“교수님, 지난번 @@대학 교수 상법 특강시간에 신교수님은 표현대리를 계속해서 ‘표견대리’라 쓰시던데요?”
“그랬어, 나도 이미 알고 있기는 했는데,기회가 되는대로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내가 대학 4학년 1학기였다. 우리 민법교수는 자신의 대학 선배인 신교수를 이번 상법특강에 초빙했다. 열강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신교수는 ‘표현대리'라 읽어야 할 것을 지속적으로 ‘표견대리’라 입밖에 내었다.
나는 순간 한 손을 번쩍 들고 이런 신교수의 오독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이 신교수로부터 잘못을 즉석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자칫하면 강의의 흐름을 방해할 우려가 있었고 어쩌면 괘씸죄에 엮일 수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중견을 너머 이제 바야흐로 원로교수 반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신교수 세대에선 표현대리가 아니라 표견대리로 읽는 것이 대세였음이 나중에 일부 해명되었다. 우리 민법교수가 이 신교수의 잘못을 나중에라도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었는지는 아직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대학 1학년 2학기 가을이었다. 9박 10일간 일정으로 우리 대학 동기 현역 남학생들은 문무대에 입소했다. 신군부가 1주일 4시간의 군사훈련도 모자라 새로이 창안해 낸 병영집체훈련이었다. 2명의 구대장이 우리 그룹을 통솔하고 있었다.
오늘 일과 후 일석점호 시간이 다가왔다. 구대장 박 중위는 정신교육의 일환이랍시고 이번에도 일장훈시에 나섰다. 그러던 중이었다. ’ 진인사 대천명‘을 ’ 진인사 시천명‘이라 잘못 인용했다. 기다릴 ‘대(待)’를 모실 ‘시(侍)’로 잘못 읽어낸 것이었다. 하나의 획 차이이기 때문에 누구든 이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럼에도 이 정도면 우리 교육생 일행 중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터저나 올 법도 했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구대장의 잘못된 인용을 지적하고 나서면 구대장의 체면이 구겨질 것은 뻔했다. 게다가 이에 관해 갑론을박이 이어지면 점호시간만 늘어질 것이고 손해를 보고 피곤해지는 것은 우리 교육생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구대장의 잘못을 핀셋으로 콕 집어내듯이 문제 삼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일병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이었다.오늘은 오전 이른 시각부터 연대장관사에 새로이 도배공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관사는 민간인이 아닌 현역군인인 연대장이 가끔 영내에서 묵을 수 있는 시설이었다. 이 도배공사란 외부 업자에게 맡기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예산을 절감하기 위한 의도였는지 사병들을 차출하는 방식인 사역으로 갈음하기로 했다.
중고참 우병장이 오늘 이 사역의 총책임자로 나섰다. 그런데 이 우병장은 이제 겨우 일병계급장을 갓 달은 정일병을 평소 매우 고깝게 생각했고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이런 정황은 오늘 이 사역장에서도 수시로 포착되고 있었다. 정일병은 자신보다 입대일이 까마득히 늦은 후임이었지만 우병장보다 연식은 오래되었고 학력이나 스펙등도 훨씬 앞서고 있었다. 때문에 이 정일병을 평소 ‘재수 없는 놈’으로 낙인을 찍어 놓고 있었다. 이는 분명 우병장 골수에 박힌 열등의식의 발로였다.
관사 도배공사 현장에 일행이 도착한 바로 뒤였다. 모든 사역병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음은 물론이었다. 풀칠이 된 작은 도배지조각을 웬일인지 특별한 이유 없이 정일병 쪽으로 몇 개 랜덤으로 집어던졌다.아무 이유 없는 화풀이로 보였다. 다른 동료 사병들도 우병장과 정일병 사이 이런 관계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조심스레 지켜보고만 있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우병장과 정일병간 불미스러운 충돌이 일어나지않기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잠시 후 우병장은 컬러 TV리모컨을 갑자기 집어 들었다.이 리모컨에는 TV전원을 켜고 끄는 단추 위에 ‘on’, ‘off’등 영문이 적혀 있었다. 이밖에 ‘mute’란 단추도 눈에 쉽게 들어왔다. 우병장은 이 ‘mute’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음성 일시 멈춤’ 정도로 옮기는 것이 무난할 듯했다.오늘 이 연대장 관사 도배공사 사역의 총책임자에다 최선임 우병장은 순간 얼버무렸다.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입밖에 낼 자신이 없었다.
“이것은 갑자기 움찔하거나 멈춘다는 뜻이 아니겠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 ‘mute’란 굳이 직역을 한다면 ‘무음의’, ‘벙어리의’란 뜻이었다. 이 단추를 누르면 화면 등은 정상작동이 되고 소리만 차단이 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화면이나 기타 기능은 그대로 작동되는 상태에서 소리만 차단할 필요가 있을 때 작동시키는 키의 기능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정일병은 우병장의 오역을 현장에서 감히 지적하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진정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했다.철저히 절대적인 상명하복관계가 작동하는 군대조직에서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를 상상해 보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거침없이 입밖으로 내는 이른바 mz세대들로 꽉 채워진 군대 사병 집단 안에선 이런 잘못된 관행은 많이 사라졌을 것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