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 사람아 그저 보는 것이 인사이지, 무슨 큰절까지 받으라고 그래.” 아버지와 친구분 사이 논란에도 우리 3형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야, 친구야 자네는 정말 기라성을 쌓고 있었네...?”
아버지는 슬하에 당신의 자식으로 3형제를 둔 것을 내심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당신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는 형의 투덜거림에도 이 아버지 친구분에게 큰 절을 올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감히 넘어설 수 없었다.
‘기라성’이란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라는 뜻이데 주로 ‘기라성 같은 선배’란 형태로 쓰인다. 신분이 높거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다. 한 때 이는 일본식 용어라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논란도 있었다.
아버지 친구분은 ‘기라성을 쌓고 있었네’ 대신 ‘기라성 같은 아들을 셋이나 두었네’로 고쳐 말하는 것이 아주 적합할 듯했다.
예전엔 상대의 체면을 고려하거나 절대적인 명령복종 체계가 작동하는 군대조직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잘못된 표현이나 단어 사용을 감히 지적할 수 없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젠 체면이나 조직의 특성 등에 덜 얽매는 최근의 MZ 세대에선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은 분명했다.
상대의 오류를 즉석에서 지적하고 고쳐주지 못하는 영역이나 사례가 점차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창피함을 느끼게 하거나 모욕, 명예훼손의 의도가 없다면 이렇게 즉석에서 상대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주는 행태는 일면 진일보한 태도로 모아도 무방할 듯했다.
“감히 건방지게 네가 아비를 가르치려들어? “
“이 까마득한 졸개가 어디서 아는 척을 하고 있어? “
“이 사람아, 그런 경우 평소 예각을 피하는 것이 원만한 인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 몰라?”
지금까지 이런 추세가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 자신의 소신과 주장을 때와 장소에 불구하고 당당히 내세우고 나서는 MZ세대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사례는 많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란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는 탁상공론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자주 쓰인다. 아무리 좋은 제안도 실행할 방법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총대를 메야하는 상황에 대한 비유로 아주 적합한 관용구이기도 하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위험을 감수하기 싫으니 남이 대신 위험을 감수하고 꼭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물론이다.
이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에 기꺼이 자진하여 나서는 이가 점차 늘어나길 기대해 본다. 이런 기대가 결코 무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대세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상대의 오류를 즉석에서 지적하고 고쳐주는 것이 미덕이 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