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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리 Jan 29. 2023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

철학이라는 초콜릿 상자

지금 이 이야기가 왜 떠오르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과거에 내가 한 지인에게 들은 바로는,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인생을 헛사는 것이란다. 그 때는 아, 그런가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책을 읽으며 사색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뭔지모를 무언가에 대한 갈망, 일상을 살아가다가 문득 느껴지는 텅 빈 무언가에 이끌린, 채움에 대한 욕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을 가까이한다고 해서 채워질 수 있다라고 확정지을 수 없지만, 이것도 내 생각엔 밑져야 본전이다. 철학이라는 초콜릿 상자를 선택한 것 뿐. 뭐가 들어가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세계로 들어가보려 한다.

이 책은 일상의 주제들을 철학과 연결짓는다. 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사상을 일상의 주제로 연결하면서 우리 삶을 조금 더 깊이있게 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은 원래 일상과 아주 가까운 학문이다. 삶에 어딘가에서든 철학이 들어있기 마련, 하지만 철학이라고 하면 모두들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들의 잘못임을 지적하면서 책의 내용이 시작된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다보니, 한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정의하는 학문이라 일상과 더욱 더 벽을 쌓게 되는 학문.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일상과 연결지으며 철학에 대한 벽을 허무는 시도를 한 듯.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한 번 더 기억하고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는 시간들을 선물받은 듯하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인상깊었던 주제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1. 해석학적 순환 - 의미는 해석을 통해 생겨난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조차도 거기서부터 시작된 질문들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의미는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던 부분이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예술작품을 의미있게 경험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술작품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사건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따져보았을 때 생기는 질문과 답을 이어나가는 것, 여기에서 독자마다 각각의 답을 이루면서 작품이 갖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각자의 가치관, 경험, 생각 등 모든 것이 합쳐진 분석의 결과들을 통해 각자의 의미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인생이라는 과정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의미가 만들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해석이란,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를 왔다갔다하면서 던져지는 물음에 답을 찾아가며 이루어진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는 삶, 미시적 관점에서 보는 삶의 부분들, 해석학적 순환에 나의 삶을 던지면 꽤나 흥미롭다. 지나온 과거 사건들이 지금 내 삶에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또 어떻게 의미있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같은 물음을 던져주고, 나는 답을 생각하는 과정들을 거치니, 긍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스쳐갔다. 또,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답들은 고정적이지 않다.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는 또 다른 사람이기에 또 어떤 답들이 나에게 찾아올 것인가 하는 생각은 뭔지모를 긍정적인 에너지와 호기심이 발동한다.



2. 세인의 삶

하이데거는 'das Man'이라는 단어로 우리 존재를 설명한다. 우리나라 언어로 번역하면 '세인'이다. 우리는 세인의 삶을 산다. 세인이란 수많은 사람의 의지와 욕망이 뒤섞인 존재라는 뜻이다.


평소 우리는 본래적인 나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세인의 삶을 산다. 내가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의 힘에 떠밀려 행위를 하며,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원하며,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언어를 따라하고 있다.(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_285p)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생각해보면 나의 습관, 말투, 행동들, 심지어 꿈꿔온 이상까지도 오롯이 내 것인 적이 없다. 타인의 여러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영향받고 나 또한 영향을 주면서 그렇게 내가 됐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줏대없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쉬운데,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본성적인 상태며, 세인의 존재 또한 나라는 사람의 단면적인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본래적인 나를 마주하는 것은 삶의 끝에서 홀로 죽음을 감당해야하는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타인의 시선과 관심에 아주 열성적이다. 타인이 보는 나, 나의 외모, 가치관, 행동 모든 것들이 타인과 주고 받는 여러가지에 의해 결정되는 순간들이 많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학습을 통해 이 사회에서 어울려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얻고,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조화롭게 살아가다가도,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순간은 오게 되어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어떻다 저떻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죽어봐서 아는데, 라는 말이 없듯이, 죽음은 누구의 영향을 받지도 받을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바로 나다. 죽음을 생각하면 본래적인 나를 인지한다. 조금만 깨어있으면, 본래적인 나와 세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능하다.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세인의 존재에 잠식당하면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인의 존재를 알아차림으로서 '후회' 라는 것을 줄일 수 있다. 내 안에 우글거리는 어떤 타인의 존재, 목소리 등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서 세인의 존재와 본래적인 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3. 부조리한 인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우리 집 강아지를 1위로 뽑고 싶다. 내 삶의 전환점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도 우리 집 빵지다. 내가 서평에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 날이 오다니, 조금 감회가 새롭다. 아무튼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그 이유에 종속된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가족 또는 돈, 명예, 자아실현 등이라면 그것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반면, 정말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죽어야 할 이유는 있을까?부조리함은 이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알베르카뮈는 정말 살아갈 이유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죽어야 할 이유도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여기에서 죽음과 삶의 평형이 이루어진다. 이 평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으로 불렀다. 부조리한 인간. 삶과 죽음의 이유에서 자유로워져있는 상태. 희망과 미래를 포기한 사람, 삶의 진정한 의미같은 것은 없다고 철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희망과 의미로부터 가장 강력한 자유가 주어진다.(p.330) 부조리한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어떤 가치를 부여하며 진정 자유롭게 종속되어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어떤 일에도 절대적인 이유같은 것은 없다. 그저 자신의 의지로서 무언가를 선택해 살아가는 것. 삶이라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참 매력적이다. 나는 앞서 의미에 대해 깊은 고찰을 했는데, 이 책의 끝에는 부조리한 인간의 매력에 대해 늘어놓다니, 나는 또 이 책의 마무리에서 갈등한다. 나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이 자유가 어떤 면에서는 또 자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무언가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닌데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또 나에게 던져진다. 부조리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렇게 되지 않는 내 자신을 생각해보면 또 갈등이 시작되는 반복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떻게 보면 자유롭게 살아야지 하는 것이 또 어떤 형태의 종속이 될 수가 있다. 내 생각에 카뮈는 어떤 절대적인 이유도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으니, 너무 애쓰며 살아가지 말자는, 그런 위로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4.통제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어떤 원칙 안에서 자유롭게 자아실현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배우고, 교육받으면서 훌륭한 시민으로서 자라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떤 부분을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아간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사회라는 울타리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되고 교육되어 살아간다. 니체가 한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의 부속품으로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했던 게 떠오르는데, 같은 맥락에서 질 들뢰르가 말하는 통제는 자유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그 자체에 대한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열심히 뭔가를 하며 살아가고, 원하는 꿈을 찾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이뤄내고,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 사회의 신념에 반하지 않는, 예를 들면,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사람으로서 살아가도록 더 깊은 차원에서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좋은 직업에 높은 연봉, 탄력근무제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원하는 자유를 주지만, 사실 그것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기업에 더 헌신하도록, 기여하도록 만든다. 또, SNS,유투브,광고 등 알고리즘을 통해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것이 정말 가치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게 더 좋아보이고, 갖고 싶고, 사고 싶게 만드는, 결국에는 우리의 목적이나 목표가 되도록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통제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의미를 찾다가, 정말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지 하면서 부조리한 인간으로 살거야. 했다가 그 자유 또한 통제의 방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가 아주 뒤죽박죽 철학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자가 이야기했던 철학과 일상의 연결지으려 했던 시도가 과연 독자인 내가 잘 캐치해서 잘 적용했을런지는 아직 물음표이지만, 내가 일상 속에서 느꼈던 의문들에 대해 사색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흥미로운 철학주제가 많았는데, 부족한 글쓰기 실력으로 이 정도밖에 담을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감정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앎에 감사하며, 논리적인 지식의 축적만을 고집해 온 내가 감성적인 부분도 경시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책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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