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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변의 잡설 Feb 03. 2023

군대가 내게 남긴 것

1.

어떤 일화 하나. 교수가 수업 후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한 학생이 손을 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송한데 저는 이미 밥을 먹어서.. 다른 식사 안하신 분들 계시면 같이 식사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일화 둘. 학생들의 발표로 진행되는 대학원 수업. 하나의 발표가 끝나면, 그에 대해 교수가 간략하게 코멘트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발표를 준비해온 어떤 학생, 자신의 발표에 대한 교수의 코멘트를 듣고는 교수가 자신의 발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지도교수의 의견을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는 일. 그리하여 코멘트가 끝난 후,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수님의 말씀도 타당하지만, 저는 .... 하게 생각합니다.”   

  

위 두 이야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면, 군대를 다녀왔거나 군대를 가더라도 눈치 없다는 지적은 듣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앞서 소위 ‘눈치’, 즉 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하기에 앞서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경험이 즉각적으로 구현된다, 또한 이를 거스르는 이에 대해서 반발 심리를 느끼더라도 그 심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합리성을 동원한다면 애초에 번지 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이는 정서 내지는 무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도리’와 ‘가라’로 상징되는, 이른바 군대문화다. 이는 한국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2.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이러한 정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면서도 완전히 체화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까라면 까”, “다들 먹고 싶은 거 골라. 난 자장면.” 식의 유머에 웃으면서도, 정작 그 유머가 실제로 구현되는 현실에는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대학에 진학하여 인간의 존엄성, 합리성, 평등 따위의 가치 등에 입각해 나름의 기준을 삼은 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위 두 번째 일화는 나의 개인적 경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야간에 개설된 대학원 수업으로, 특히 간부급 기자들이 많이 수강하는 수업이었다. 내가 교수님께 위와 같이 말(대답)하자, 다른 수강생들, 특히 선배들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수업 후 회식이 이어졌고, 몇몇 선배들이 내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아도 교수님께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한 유력 방송사의 PD인 선배는 넌지시 내게 ‘협동정신’이 부족하다고 충고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학, 특히 대학원은 상아탑, 학문의 전당이고, 학문에 있어 스승-제자간 우열관계는 인정하지만,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동지적 관계 아닌가. 명백하게 틀린 부분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리하지 않을까. 물론 그 과정에서의 예의는 당연히 지켜야겠지만.           



3. 

이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역시나 군 생활을 통해서였다.     

 

엄격한 부모님 아래에서 성장했고, 덕분에 초자아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신병훈련을 받으며 묘한 안락함을 느꼈다. 매일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옷을 입고 밥을 먹고, 훈련을 받고. 군대는 오랫동안 입지 않았지만 여전히 익숙한 옷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가끔 조교들이 시비를 걸어오긴 했지만,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맞았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게 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군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이며, 숙식을 함께 하더라도 나와는 신분이 다른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나는 복종하거나 명령, 지시를 내려야 하며(엄밀히 법령에 따르면 이는 불법이다),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많은 게 힘들어진다.     


또한 군대는 조직이다. 어떤 조직이든 나름의 관습과 문화를 지니고 있고, 새로운 개인에게는 조직 문화에 적응할 것을 암묵적으로든 강요하게 마련이다. 적응하지 못한 개인은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된다. 사회에서 누리던 대부분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은 차치하고, 조직의 틀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하루 24시간 내내 온몸으로 견뎌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나의 경우 늦은 나이에 입대했고, ‘가방끈 길고 나이 많은 놈은 잘해주면 기어오른다’는 공감대가 자대 내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등병 생활은 분명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일병으로 진급하면서 슬슬 군 생활이 몸에 익었고, 후임들이 조금씩 생겨나면서 군생활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인동기가 마뜩치 않은 사회에서 기득권이 유지되는 방식, 무난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을 선호하는 정서, 내실보다는 외형으로 평가하는 관행, 윗사람에 대한 의전 등등. 나는 한결같이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입대 전에 느꼈던 불편함과 정확히 닮았다. 순간순간 무언가 불편한 순간에 맞닥뜨리면서도, 그 진원지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게 몹시 갑갑하게 여겨졌다. 물론 활자를 통해 접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사회를 글로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군대였던 것이다. 군대는 시민을 규격화된 인간으로 찍어내기 위한 하나의 공장과도 같았다.          




4. 

그리하여 전역 후 나는 위의 첫 번째 일화에 주어진 상황에서 교수의 제안에 적절히 응대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배부른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협동정신’ 운운하는 선배가 되긴 여전히 죽기보다 싫었다. 사회적으로 ‘튀지 않고’ 무난하게 행동하지만,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체화되어 버린 권위적 행동양식에 상반된 행동을 해야만 한다.      


또 다른 어려움은 우리 사회의 유교적 전통 역시 주요 변수로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교적 가치질서가 군대와 동의어는 아니다. 분명 계승해야 할 바람직한 전통문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 순간 자기검열을 하는 상황에서, 권위주의와 유교적 행동양식의 구분, 그리고 전통과 폐습의 분별은 너무나도 어렵다.           



5.

평시 국토방위와 전쟁억지, 전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연간 30조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지만, 60년간 전쟁을 치러보지 않은 무능한 조직. 전장인 최전방보다는, 계룡대에 무게중심이 쏠려있는 관료조직. 상부검열에 맞춘 형식적 교육훈련, '유도리'와 '가라'의 공간,      

정리작업 없이 무작정 군 생활을 추억하면, "군 생활도 할만 했다", "나는 군 생활 잘했다", 혹은 "군대는 지옥이었다." 등등의 극단적인, 단편적인 미담, 혹은 무용담 수준에 그칠 것 같아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동안의 잡념들을 어떻게든 기록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살았다는 자괴감,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훨씬 뛰어난 동료들을 보면서 했던 반성, 부조리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나의 고지식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등등을 적어둔 메모들을 오랜만에 들여다보니 기분이 새삼 새롭다.     


군대에 다녀와서 나는 제법 무난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성격이 원만하고 대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변한 데에는, 많은 것에 욕심이나 집착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특정한 가치관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한때 인정투쟁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기를 꿈꾸었지만, 이젠 그런 원대한 꿈 따위는 꾸지 않는 게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변했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세상은 무난한 사람이 되라고, 자신의 뾰족한 목소리는 다락방 깊은 구석 서랍장 속에나 감추어두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다. 이제는 머리 뿐 아니라 가슴 속 깊이, 이런 세상의 '진리'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 두려울 때가 있다. 하지만 틈틈이 아래의 시구처럼 안개의 탓을 그저 개인적 불행으로 돌리지는 말자고 중얼거려본다. 흙빛이 되어 ‘협동정신’ 운운하는 선배가 되기란 여전히 죽기보다 싫다.          




1     

아침저녁으로 샛江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邑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江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一行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空中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江에서 한 발자국도 移動하지 않는다.

出勤길에 늦은 女工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步行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食口가 되고

멀리 送電塔이 희미한 胴體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江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空氣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植物들, 工場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 당했다.

寄宿舍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三輪車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不幸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正午 가까이

工場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發水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邑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江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邑의 名物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株式을 가지고 있다.

女工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工場으로 간다


- <안개>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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