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변의 잡설 Sep 07. 2023

판결문을 받고 나서

변호사로 일한 지도 만으로 8년이 다 되어가지만, 재판 결과를 받기 직전엔 늘 심란하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땐 모든 걸 가진 듯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심할 땐 온몸이 아프다. 경력이 쌓이면 감정이입의 정도도 덜하다고 하는데, 난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든다. 


판결선고 당일 결과를 알 수는 있지만, 그 이유까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판결 이유는 판결문에 기재되어 있는데, 판결문이 판결 선고 당일에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며칠 뒤에 나오는 경우도 제법 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1심에서 일부 패소하고 나서 항소심에서 완전히 뒤집은 경우이다. 판결 선고 당일 결과를 듣고 안도했는데, 며칠이 지난 뒤에 판결문을 받아볼 수 있었다. 모든 사건이 다 각별하지만, 이 사건은 특히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특별히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1심에서는 판사님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우호적으로 재판을 진행한다는 느낌이었다. 상대방이 여러 차례 재판에 불출석하고, 재판 직전에 서면을 제출하고 증거신청을 하고, 심지어 법리에 명백히 맞지 않는 주장을 해도 하나하나 다 받아주고 석명이라는 방식으로 힌트를 주셨다. 변론주의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반발심이 들었던 것은 해당 판사가 우리에겐 매우 박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재판 내내 느낌이 좋지 않았고 기일이 되어 재판에 출석하는 날이 되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에게 매우 불리한 판결이 선고되었고, 판결문에는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가득했다. 


곧바로 항소를 했다. 항소이유서를 써야 하는데 도무지 쓸 의욕이 나지 않았다. 분명 항소이유서를 쓰기 위해 앉았는데, 자꾸만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비로소 문장을 쓸 수 있었다. 1심 판결은 이러이러하게 판단했는데, 이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고 사실을 오인한 것이니 부당하므로 바로잡아달라. 1심 판결을 지적하면서도, 무례해 보이지 않게, 한편으로는 이 긴 글을 최대한 읽기 편하도록, 고민하면서 서면을 썼다. 마치 연애편지를 쓰는 심정이었다. 억울한 면이 있으니 제발 이 글을 읽어주고 심정을 알아달라고 호소했다. 


항소 후 반년이 지나 첫 기일이 열렸다. 판사님은 대뜸 내게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어요'라고 했다. 이미 서면을 냈으니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지만, 요점을 간략히 진술했다. 판사님은 사건의 쟁점이 될만한 내용에 대해 당사자의 진술을 정리해 변론조서에도 남기도록 했다. 매우 희망적인 신호였다. 변론조서에 남겨진 내용은, 1심 판결내용에 명백히 반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판결 선고 당일 들은 결과는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다. 결과만으로도 감사했지만 얼른 구체적인 판단내용을 보고 싶었다. 하루를 넘겨 저녁 6시경 판결문을 받았다. 재판 중에 받은 느낌 그 이상으로, 우리 주장이 그대로 판결문에 담겨 있었다. 판사님이 감사하게도 우리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준 것이다. 


항소심에 이르러 우리가 새로운 증거를 낸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불리한 진술을 한 것도 아닌데, 결과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저 판사님을 잘 만난 복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항소심에서 항소이유서, 상대방에 대한 반박서면, 추가서면까지 총 3건의 서면을 제출했는데, 각각의 서면을 쓰며 느꼈던 절절한 마음을 계속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애편지 쓰듯 서면을 쓴다면, 그 서면을 읽는 판사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여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설령 미신과 같은 부질없는 소망일지라도, 쓰는 내내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최소한 내게는 매번 귀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20년 전 엄마에게 있었던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