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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변의 잡설 Oct 04. 2023

논술

어찌어찌하여 논술 출제 및 채점하는 일을 돕게 되었다. 논술 과외를 몇 번 하긴 했었는데, 이렇게 다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 처음이다. 몇 달간 경험하면서 느낀 점을 간략히 적어본다.



1. 손으로 답안 쓰게 하는 건 부적절하다


응시자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얘기부터 해볼까 한다. 당장 내가 너무 답답해서.. 


채점자 입장에서 보면, 수기 답안지는 일단 채점부터가 고역이다. 타이핑하여 답안을 작성하더라도, 사람들마다 문체가 다르고 비문이 있는 경우도 있어 글의 구성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하물며 손글씨로 작성된 답안지는 오죽할까. 예쁜 글씨체는 확실히 눈에 들어오지만, 흘려 쓴 악필은 첫 느낌부터가 좋지 않다. 물론 악필이라도 반복하여 열심히 들여다보려 하지만, 점수에 아예 영향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수천장의 답안을 채점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시험시행의 취지에도 맞지 않다. 글씨를 못써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시험은 주어진 시간 내에 실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지, 글씨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글씨를 느리게 써서 불이익을 받는 이들도 있는데, 이 또한 부당하다. 그저 글씨 써내기에 급급하여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답안을 써내고 마는 이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CBT로 바꿔야 한다. 타이핑하여 답안을 작성하게 한다면, 글씨를 못써서 늦게 써서 불이익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변했는데 수기 답안작성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부정행위가 우려된다지만 방지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도입하는 데에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이를 감수하고라도 바꿀 이익이 충분하다. 



2. 완결성과 깊이를 고루 갖춘 답안이 많지 않다


과거에 비해 출제방식이 다양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특정 주제에 대해 찬반양론을 살피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답안을 살피다 보니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한 (이를테면 맞춤법 오류, 비문 등을 면한) 답안 중 상당수가 결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논지가 분명한 경우 반대 논거를 살피지 못했고, 양 입장을 골고루 살핀 경우 논지가 흐릿했다. 


물론 제한 시간이 60분, 제한 분량이 1200자에 불과한 상황에서 요구하는 기준이 과도한 것 같기는 하다. 채점자 입장에서 답안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다 해도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은 답안일 수도 있다. 사실 막상 내게 작성 시간에 맞추어 답안을 써보라고 한다면, 응시자 수준 이상의 답안을 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CBT로 방식을 바꾸고, 시간과 분량 제한을 완화한다면 충분히 수준 있는 답안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당장 요행을 바랄 수는 없고, 현실에 맞추어 최대한 고득점을 받을 수 있도록 연습하는 수밖에 없겠다. 구체적으로, 원고지 배점 기준에 맞추어 답안을 작성하되, 입장을 골고루 다뤄주되 일관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다. 앙상하게 키워드 위주로 다루더라도 골고루 언급해 주는 게 중요하다. 깊이 파고들기만 한 답안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이다. 


말이 쉽지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장을 압축적으로, 키워드 위주로 써보는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한자를 습득하는 게 참 중요해 보인다)



3. 어설프게 문자를 쓰는 건 감점 요소


여러 채점자들과 의견을 나눠보니, 배경지식이 얕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좀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답안이 있었는데, 맥락이 맞지 않는 인용은 도리어 감점요소가 될 뿐이었다. 


물론 응시자들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나 또한 대입 논술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일차원적 인간에서 어쩌고 했듯이'라고 써놓고는 우쭐했던 이불킥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전공자인 채점자에게 잘못 걸리면 괜히 부정적인 인상만 남길뿐이다. 전공자들은 개념어 사용에 엄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법학에서 '구성요건'과 '요건'은 언듯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응시자 입장에서 좀 유치해 보일지 몰라도, 평범한 용어를 사용하되 오로지 논지를 정면으로 건드린 답안,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고 반박논거를 재반박한 답안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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