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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변의 잡설 Dec 09. 2023

어떤 사기사건 종결 후기

2019년부터 4년을 끌어왔던 P모 P2P업체 사기사건을 이번 주로 종결하였다. 아래에는 간략한 소회를 적어봄. 앞서 다른 곳에 거친 어조로 소회를 적어놓긴 했는데, 이곳에는 나름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표현을 순화하여 적어보기로 함. 


1. 사기사건 상대방이 드디어 돈을 입금함. 2019년말에 시작했으니 무려 4년만이다. 원금의 80% 회수. 이 사건에 투입한 시간이 300시간이 넘음.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와중에는 다 돌려받지 못해 아쉽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참 뭐랄까 만감이 교차하는 사건이었다. 



2.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지긋지긋한 사건이었다. 지나치게 의뢰인에 감정이입한 사건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다른 사기사건과 비교해보아도 유난히 피해자들에게 무례했다.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비굴하게 만들면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스킬을 가진 고도의 꾼이었다.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았다는데 짬이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명언 "소송해봐야 과실상계로 30퍼 정도 깎일텐데 그냥 절반에 합의하시지예") 


상대방과 직접 통화하면서 화도 내고 윽박도 지르고 나중엔 미운 정도 드나 했지만, 합의하고 입금하기로 한 당일 갑자기 말을 바꾸거나 잠수를 타는 등 결정적인 시기마다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돈을 회수한 이후에도 한동안 분이 풀리지 않고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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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편 피해자 대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지난 4년간 사건을 진행해 오면서 나는 그저 쪼잔하고 소심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걸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 선의, 의협심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몇몇 피해자들에게 서운함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차라리 가해자는 돈이라도 많이 주고 변호사에게 고마워하기라도 하는데, 내가 겪은 어떤 피해자들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변호사에게 쏟아붓고 정서적으로 심하게 의존했다. 내가 변호사인지 심리상담사인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일할 때에는 분명 본전 생각없이, 계약한 업무범위와 무관하게 몰입했고, 그걸로 만족하면 그만이었겠지만, 한편으로 나는 피해자가 내 노력을 알아주고 고마워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내 노력과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할 때("돈을 받았으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를 계약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극도의 서운함과 분노를 느꼈다. 서로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걸 확인하면 그만이었을까. 내 그릇이 딱 그 정도였는데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니 피해자 대리를 할 때에는 위임계약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특히 이런 투자 사기 사건의 경우, 진행 도중 예상치 못하게 업무가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 일하는 입장에서도 욕심이 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걸 하면 뭔가 나올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런 추가업무에 대해 일일이 피해자에게 비용을 청구하면 되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피해자는 대체로 비용을 지불할 물적 심적 여력이 없을 뿐 아니라, 계약 체결 당시 예상치 못했던 추가 비용을 청구받을 경우 변호사에 대한 신뢰까지 깨질 수 있다. 따라서 피해자 대리를 하려면 애초 위임계약을 할 때 업무범위를 세밀하게 나누거나, 돈받은 것보다 일을 더할 각오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보통 후자로 귀결되기 마련이었고, 남은 사건들도 그렇게 진행하게 될 것 같다. 여러 모로 피폐해지고 만다. 그러니 앞으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해자 대리 사건을 사로 맡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홧김에 맡을지도 모르겠다. 


변호사가 이런 말 한다고 너무 안좋게 보시지 말고 이런  부분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해주시길.




4. 우리 수사기관의 현실을 절감한 계기이기도 했다. 너무 솔직하신 나머지 '주말에 부산내려와서 같이 검토 좀 하시지예' 라고 하던 경찰 수사관님 보면서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중엔 친해져서 이것저것 다 해드림(앞서 쓴 글 링크 참조). 비록 피곤하긴 해도 시간만 끌면서 사건을 뺑뺑이 돌리는 수사관보다 저렇게 솔직하고 담백하게 도와달라고 얘기해주는 수사관이 사건진행에는 훨씬 도움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경찰에 있던 친구에게 하소연하니 '수사관이랑 싸울 게 아니라 최대한 돕고 설득하라'는 조언을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맞는 말. 한편, 그 와중에 유튜브에서 검수완박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를 보면 짜증을 넘어 허탈하기만 했다.



5. 민사집행 현실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판결문 받아봐야 집행이 안되는 현실을 사기꾼들이 너무나 잘 알고 교묘히 악용한다. 법 좀 아는 사기꾼이 빼돌린 재산을 현금화해서 묻어놓거나 여러 법인을 도관으로 삼아 세탁하면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이러한 현실을 방치하면 사법불신이 심화되고 사적보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현재 유튜브에서 각종 사기꾼 응징 영상이 유행한다는 점이 그 방증이다.


'답이 없다'고 개탄할 게 아니라 정말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 일반 민사집행에서도 마치 양육비대지급제와 같은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분명 지금도 노력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고 나도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열심히 파고들고자 한다.



6. 비록 아쉽게 끝났지만 자꾸만 복기해보게 되는 사건이고,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이어갈 생각이다. 4년간 축적한 자료들이 상당하고 파생되는 여러 쟁점들이 많다.


이 사건을 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정말 우연과 행운, 기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사건 진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블로그를 통해 연락주신 경우도 제법 많아서, 앞으로도 이곳에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마음을 착하게 먹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물론 실천은 어려움), 이 사건을 끝마치고 나니 더욱 그러한 확신이 강해졌다. 착하게 사는 것과 돈을 많이 버는 건 완전 별개지만, 맑은 정신,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할 땐 좋은 아이디어가 마치 우주에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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