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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29. 2022

실장님, 라떼 한잔 하실래요?

과거를 가치있게 음미하는 방법

4년 만에 실장님을 만났다. 그와의 인연은 공기업 근무 시절인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부터 가까웠거나 급속도로 친밀해진 사이었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저 평범한 직속 상사와 부하 관계였을 뿐이다. 직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상하 관계가 그렇듯 몸이 멀어지면 스쳐 지나갈 법한 인연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차장님이었던 실장님(몇 년 전에 실장님으로 승진, 정년을 앞두고 계심)은, 처음 몇 개월간은 나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데다 거리를 두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래서 더더욱 무미건조한 비즈니스 관계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장님의 성향이나 성격 상, 과도한 관심과 간섭으로 불편을 느낄까 봐 배려해주신 게 아닐까 싶다.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데워가며 오래도록 따뜻함을 유지하는 사람. 그게 실장님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뭉근한 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명절이면 "동원 (혹은 CJ 등등 아무튼 식품회사들) 선물세트 1호, 지하 1층 슈퍼 명절 선물 코너"라고 적힌 종이를 건네주시곤 했는데, 지금은 생소한 아날로그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미리 구매를 해두시고 이렇게 교환증을 받아오셨던 것 같다.  

점심 식사는 아랫사람이 메뉴나 식당을 정해서 윗사람을 모시고 가야 한다는 꼰대 마인드도 없었다. 점심 약속이 있냐고 먼저 물어오셨다. 없다고 대답하면, 오늘은 함께 가자고 하셨다. 당시 과장님(몇 년 전에 부장님으로 승진하심)과 함께 나간 자리에는 타 부서 부장이나 차장 급의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 계셨다. 처음 본 분들께는 나를 이렇게 소개해주셨다.


"우리 OO 주임. OO 업무 담당하고 있어. 내가 그때 말한 적 있지? 야무지고 일 잘해."


위계질서가 명확한 공기업에서는 이렇게 직급을 몇 단계씩 건너뛰어서 만나는 자리가 흔치 않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귀한 경험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장님은 마당발 또는 인맥왕으로 통하는 인사였다. 나에게는 굉장한 행운이었다.

팀 회식 날로 기억한다. 모두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케이크를 사들고 들어오시더니 초를 큰 놈으로 3개 꽂으셨다.


"오늘은 OO 주임 입사 3주년이잖아! 우리가 축하해줘야지."


공기업은 호봉제이기에 매월초 승급 대상자를 공지한다.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던 걸 눈여겨보셨던 거다.

당시 나는 아직 입사 3차로 엉터리에 실수 투성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결국 터져버린 날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켜내며 밥도 못 먹고 문제 해결에 골몰하는 내게 "밥 먹고 와"라고 하셨다.


"어떻게 밥을 먹어요. 큰일 났는데..."

"내가 책임질게. 너는 밥 먹어."


그래도 꼼짝을 않자, 옆팀에 업무가 바빠 혼자 남아 있는  여자 선배를 부르신다.


"OO 대리, 식사 안가? 밥은 먹고 해야지. 우리 OO 주임 좀 데리고 가서 밥 좀 먹여줘."


어리둥절하다 선배 손에 이끌려 강제로 밥을 먹으러 나갔다. 점심을 먹고 오니 말끔하게 이슈를 해결해놓으셨더랬다. 너무 죄송해서 커피 한잔 사다 드렸다. 즐겨 드시던 에스프레소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20대 후반, 한창 치열하고 열정적인 데다 진취적으로 앞만 보던 나이었기에 몰랐다. 그런 베풂과 배려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지를...


삶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아마도 공기업 지방 이전으로 인해 서울에 있는 회사로 이직한 이후였던 것 같다.


과거로 완연히 흘러들어 갔을 때, 문득 그때가 행복했음을 깨닫게 된다. 대개는 현재가 썩 마음에 들지 않거나 허전한 구석이 있거나 채워지지 않는 씁쓸함이 있을 때 과거의 한 때가 감사한 시간들이었음을 절절히 실감한다. 과거는 더 이상 살아 숨 쉬지 않지만 현재의 내 상태, 상황, 기분, 감정, 가치관에 따라 되살아난다.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가 "그때"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고이 접힌 편지를 한 면씩 펼쳐가며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좋은 기억은 마치 햇살이 드리우듯 선명하고 또렷하다. 어제 일인 것처럼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내, 과거로의 여행을 마칠 시간이 된다. 언제까지나 감상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다. 행복을 충분히 만끽했다면 다시 현재로 돌아가야 한다.  


정성스럽게 한 면씩 접어둔다. 흐트러짐 없이 기억하고 싶어서. 대충 접었다간 그 장면들이 다른 것들과 뒤섞이거나 혼탁해질까 봐. 흩어지지 않도록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좋은 과거의 기억들은 그렇게 정돈해놓고자 한다.



4년 만에 만난 실장님은 에스프레소가 아닌 라떼를 주문하셨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울고 웃었던 지난날을 추억했다. 반짝이던 그때를 칭찬하기도 치켜세워주기도 하면서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잘 모르게 된" 현재를 묵묵히 있는 그대로 응원했다.


아, 라떼는 이렇게 마시는 것이로구나!


나의 과거를 모르는 이들에게, 심지어 궁금하지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라떼는 "Latte is horse" 말 그대로, 개소리 잡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의 라떼가 그런 인스턴트 취급을 받거나, 소음 공해로 흩어져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는 건 과거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소중할수록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진한 에스프레소 향을 부드러운 우유로 감싼 라떼를 천천히 음미하 듯, 그 시절을 지긋이 함께 관조해줄 수 있는 사람과 나누어야 그때의 내가 더 빛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함께 좋은 추억을 간직한 다른 이들에게도, 따뜻한 라떼 한잔을 권하며 당신의 과거는 찬란했고 영롱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가을 햇살 아래 해사하게 웃고 계시던 실장님을 응원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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