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거백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 Oct 10. 2023

4. 니가 사는 그 집

#난 그와 그의 엑스가 살던 집에서 살고 있었다

 S와 동거를 시작한 지 이미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S는 매년 연말이 되면 가족들을 만나러 네덜란드로 가곤 했는데, 이번 해에는 나를 데려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가족들을 처음으로 만나 보기도 했고,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함께 보낸 이후 우리의 사이는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S의 페이스북에서 그의 가족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에 누군가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긴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헤이 S. 벌써 여자 친구가 생긴 거야? 와우. 행복해 보이네." 여자의 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댓글을 보고 뭔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영어 감탄사 '와우'는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문맥에 따라서 부정적인 의미로 이용될 수도 있는데, 분명히 이번 경우의 '와우'는 비꼬는 듯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친구 관계까지 간섭하고 싶지 않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며칠 뒤 나는 그의 아이패드에서 A라고 저장된 낯선 이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안녕 S. 잘 지내? 얼마 전에 너희 어머니 생신이셨지? 늦었지만 생신 축하한다고 전해드려. 가족과 즐거운 시간 보냈기를. 나는 미국에 다시 잘 정착했어. 너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커. 새로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더라?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그는 '축하해 줘서 고마워. 너도 잘 지내. 그럼 안녕.'이라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A가 페이스북에 댓글을 단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녀가 S의 엑스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나를 만나기 전에 미국인 여자친구와 4년 정도 장거리 연애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연애 과정이 어땠는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언제 헤어졌는지 등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런 걸 꼭 알아야 하는지 필요성도 못 느꼈었다. 그러나 이 메시지 이후 나의 태도는 달라졌다. 나는 S가 그녀의 번호를 지우지 않은 것도,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낸 것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메시지는 우리의 다툼으로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왜 엑스의 번호를 지우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페이스북 친구로 남아 있느냐로 시작된 다툼은 의도치 않게 크게 번져 내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바로 우리가 같이 사는 이 집이 사실은 그녀와 같이 살기 위해 이사했던 집이고, 심지어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와서 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나는 그와 그의 엑스가 살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의 과거 연애도 성숙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과거의 연인과 동거를 했다는 것은 듣기 좋은 일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는 동거가 결혼보다 흔한 일이니 백 번 양보하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집이 그 집이라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우리가 함께 쓰고 있는 침대는 사실은 그와 그녀가 함께 쓰던 침대였다. 우리 함께 포개져 앉아 영화를 보던 소파도 그와 그녀가 함께 쓰던 소파였다. 그때의 감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S가 이 말을 하기 5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사실을 알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나는 크게 충격받았고, 이건 우리의 동거 생활의 최대의 위기였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S는 그녀와 4년을 연애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미국-유럽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였다. S가 더블린으로 온 후로는 서로의 관계가 부쩍 더 소홀해져 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고, 그녀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더블린행을 결심했다. 그는 시티에서의 생활을 접고 그녀와 함께 살 집을 구해 더블린 외곽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4년 간의 긴 연애는 2개월 만의 동거 생활 후 완전히 결말을 맞게 되었다.


 그녀는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심각한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고, 우울해 하기 시작했다. S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온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이 안쓰러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미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했고, 방에서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집 안의 분위기는 항상 무거웠고, S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 가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매일 우는 그녀를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위태로웠지만 그는 그녀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완전히 종결시킨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고백했다. 그녀가 미국에 있을 때 그녀의 회사 동료와 잠을 잤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너무 외로워서 그랬고,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고. 그녀가 그토록 우울했던 이유도 그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미안하고, 이 사실이 언젠가는 밝혀질까 싶어 너무 불안해서였다. 그들의 4년 간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S는 그녀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남긴 후 출장길에 떠났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티켓을 사 다시 그녀가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맞아. 내가 이 집에서 그녀와 살았다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는 그녀와 제대로 끝맺음을 할 수 있었어. 안 그랬음 지지부진하게 장거리 연애를 이어갔겠지. 그녀는 두 달 동안 짐가방을 풀지도 않았어. 언제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그의 해명에 다툼은 종료가 되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쿨하지가 않았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연애 관계에서 열등감과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간을 그와 보냈다는 열등감.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블린에 올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 그녀가 백인에 파란 눈을 가졌다는 사소한 사실에 대한 열등감까지.


 그가 4년 간 연애를 했던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전에는 전혀 중요치 않았던 그 사실이 지금의 나를 가장 힘들게 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지금은 나를 잠 못 들게 하였다. 나는 그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뒤져 그가 나를 만나기 이전 과거의 일까지 추궁했다. 어쩔 때는 괜히 집을 샅샅이 뒤져 그녀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싸움을 걸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네 탓'이었다. 그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까지 그의 탓으로 돌렸고, 그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말을 쏘아대었다. 내가 그의 서랍장까지 뒤져가며 일부러 싸울 거리를 찾는 모습을 보며 그도 한계를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일에 한동안 나의 마음과 정신을 잡아먹혀 내가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을 주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동거 생활의 위기는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지난날 나의 모든 기쁨이 그랬듯이 나의 모든 슬픔의 근원 역시 내 안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내 감정의 근원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 나는 이 말을 진즉 알았을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내가 그때 상황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면, 둘 다 조금은 덜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더 이 주제로 크고 작은 다툼을 반복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동거의 최대 위기를 극복했다. S는 이 주제에 대해서 만큼은 나에게 끊임없는 인내심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의 인내에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했다. 그렇게 우리의 사이는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 다는 옛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별일 아닌 일이 되었고, 별일 아닌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아주 먼 훗날, 우리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S와 나에게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연락을 해 온 적이 있다. 그에게는 축복의 메시지를, 나에게는 저주의 메시지를 보냈다. S는 내 반응을 살피느라 살짝 긴장한 눈치였지만 나는 그냥 크게 웃고 말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 또 마음만 먹는 다면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매거진의 이전글 3. 살림의 정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