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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순간들

by 소정

살다보면 좋은 만 있을 수는 없다. 어렵고 힘든 일 투성이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에서 좋은 추억만 쌓고 싶은 건 여행자의 바램일 뿐이다. 예상치 못한 불상사에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다.

마닐라 대성당


1. 소매치기
태국 방콕 시암(Siam) 에서 쇼핑을 마치고 버스를 탔다. 에어컨이 없는 버스는 한증막이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매연덕에 콧속은 새카맣다. 민주 기념탑 근처에서 내렸다. 기진맥진한 채로 숙소를 향해 걸어간다. 오늘따라 배낭이 왜 이리 무거운지. 숙소에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과 피로감이 더해 앞으로 잘 매고 있던 배낭을 등에 멨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며 걷던 중 무언가 오싹한 ‘촉’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남자의 손이 제 배낭 코 앞까지 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방콕 민주화기념탑


중국 상하이 시외터미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니, 더한 경험이었다. 겨울의 상하이는 아릴듯한 바람이 손과 귀를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대륙의 인구답게 터미널 앞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 "까야!" 하고 아내가 소리친다. 놀란 나는 아내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내는 낯선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저 사람이 내 가방에 손을 넣었어!“
울먹인다. 그 남자가 귀중품이 든 아내의 가방을 훔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갓난 아기를 안고 있었다.
‘별의별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더니 아기를 안고 도둑질하는 사람까지... ’
화를 못이기고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도리어 내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언성이 높아지자 우리 주변으로 험상궂은 중국 남자들이 우리를 감샀다.
‘이들은 한패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그들 안에 갇혔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상하이 버스터미널


2. 환전 사기
발리에서 겪었던 일이다. 고즈넉하고 평온한 우붓을 뒤로하고 꾸따로 돌아왔다. 시끌벅적한 음악, 잔뜩 화가 난 파도와 그에게 도전하는 서퍼들 덕분에 24시간 활기찬 이곳이다. 여행의 종반부로 치닫다 보니 돈도 바닥을 보인다.
"여보 돈이 거의 다 떨어졌네요. 환전해야겠는데?”
"그래요. 100달러만 해 오세요."
아내가 건네준 100달러를 손에 쥐고 근처 환전소로 향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환율이 좋은 환전소가 보였다.
‘아싸!’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 갔다.

"Could you exchange US dollar to rupiah?(100달러를 루피아로 바꿔주세요."
하고 100달러를 주었다. 미국 달러는 100달러가 환율이 좋은 편이다. 환전소 직원은 계산기를 두드린 후 금액을 보여주고 루피아로 환전해 주었다. 내 눈앞에서 돈을 직접 세 보이면서 금액을 확인시켜 주었다.
‘정확한 금액이군.’
환전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숙소로 돌아왔다. 아뿔사, 아내가 돈을 세어보니 2만 루피아(약 17,000원)가 빠져 있는 것 아닌가?
'당했다!
순간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밑장 빼기다. 환전소 직원은 내게 돈을 건내주면서 2만 루피아를 숨겼던 것이다. 창피했다.
'그냥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야겠지?‘
포기하려고 하는데,
"이런 나쁜 xx, 환전소 어디야? 앞장서요!"
아내가 제 손을 잡고 환전소를 찾아 갔다. 나는 누나 손을 잡은 동생처럼 따라나섰다. 환전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놈 맞아?“
라는 아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Did you cheat me?(나를 속여!)"
분노에 가득 찬 아내의 목소리에 환전소 직원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갑에서 100달러를 꺼내 돌려주었다. 나는 아내의 뒤에 숨어 "야! 이 xx야”하고 소심한 복수를 했다.
‘우리 아내 멋지다! 역시 우리 집 가장!’

3. 마약
늦은 밤 베트남 호찌민에 도착했다. 부랴부랴 숙소를 잡고 바람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여행자 거리인 부이비엔 (Bui Vien) 은 네온사인과 현란한 음악이 여전하다. 그런데 경비원이 갑자기 어깨를 잡더니 다시 들어가란다. 늦은 밤 홀로 나가는 건 위험하단다. 경비원에게 숙소 앞에서 5분 정도만 바깥 공기를 쐬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호찌민의 내음을 느끼고 싶었다.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앞에 멈췄다. 대마를 구하냐고 물어본다. 필요 없다고 하니 다른 마약을 권유한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니 굳은 얼굴로 소리를 치더니 가버렸다.‘
이래서 나가지 말라고 했구나.’
경비원과 멋쩍은 웃음을 짓고 방으로 들어 왔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늦은 밤 마닐라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하루 종일 먹질 못해 아사 직전이었습니다. 근처 한식당이 있다길래 무작정 찾아갔다. 해가 지면 위험한 필리핀이지만 배고픔이 먼저였다. 한식당에서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를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듬성듬성 밝힌 가로등 사이로 어둑함이 나를 극도로 긴장하게 했다. 군필자 답게 사주경계하며 걸어갔다.
'Drug?'
지나가는 필리핀 남자가 마약이 필요하냐고 물어본다. 자기는 대마부터 해서 최신 유행하는 마약을 다 갖고 있다고 한다. 나는 못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길가에는 만취한 한국 사람들과 주점의 여직원이 다툰다. 숙소에 도착하고 나니 다리가 풀렸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좀 전에 본 한국 사람들이 생각났다. 만취한 이들은 중년 남성과 10대 남학생들이었다. 창피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닐라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가이드북이나 외교부에서는 '지나치게 환율이 좋은 환전소를 주의하세요.', '귀중품은 복대를 사용하거나 배낭은 앞으로 메고 다니세요.', ‘밤에는 밖에 다니지 마세요.’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기분에 취하거나 긴장이 풀리면 안전 수칙을 잊어버리게 된다. 여행 막바지에는 ‘나도 나름 여행 고수지.’라며 건방을 떨기도 한다. 초심을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그 때 여행의 악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여행은 일탈이 아니다. 낯선 곳에서의 일상이다. 원칙과 절제가 중요하다.
해지기 전에 숙소에 돌아오기,
사람이 자주 다니는 곳으로 돌아다니기,
낯선 이의 과한 호의 조심하기,
같은 것들을 지키면 여행은 더 값진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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