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드라마에서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장면을 보는데 숨죽이며 들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15화, 말실수하는 염기정 (이엘)
"오십.
오십에도 무슨 감정이라는 게 있을까?
그 나이 되면 그냥 동물 아닐까 싶다.
살아있으니까 사는 우물우물 여물 먹듯이 먹고 그러는."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15화, 말실수하는 염기정 (이엘) 대사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15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정영주'
"살아있으니까 산다 싶은
우물우물 여물 먹는 동물인,
오십인 여자가 말해줄게.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는데,
서른이면 멋질 줄 알았는데 꽝이었고
마흔은 어떻게 살지?
오십은 살아 뭐 하나 죽어야지 그랬는데
오십? 똑같아.
오십은 그렇게 갑자기 진짜로 그렇게 와.
난 열세 살 때 잠깐 낮잠 자고 딱 눈 뜬 것 같아.
팔십도 나랑 똑같을걸."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15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정영주'가 내공 담아 말하는 나이 '오십' 대사 -
'박해영' 작가가 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15화 중에서 염기정과 정영주의 대화는 여운이 오래 남는 장면이었다. 숨죽여 보다가, 숨죽여 듣고, 숨죽이게 되는 나이 오십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듯한 염기정의 대사가 후들후들하다. 정영주의 실감 나는 연기력도 후들후들하다. 더불어, 작가님의 필력이 후들후들하다. 아니, 작가님의 인생 내공이 후들후들하다. 아니, 작가님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후들후들하다. 나는 어떤 지점에서 눈물이 난 걸까? 어디쯤에서 위로와 위안이 되었던 걸까? 왜 숨죽이면서 들었던 걸까. 왠지 모를 해방감이 들었다.
나도 열세 살 때 잠깐 낮잠 자고 딱 눈 뜬 것 같다.
그런데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중학생인 여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서 모르는 걸 물어올 때가 있다. 그럼 나는 그런다.
"여름아, 엄마는 그거 배운 지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 가서 기억이 안 나. 2년 전에 배운 봄이 언니한테 물어봐."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던 열세 살 소녀는 어느덧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누가 나를 여기다가 데려다 놓은 거지.. 정말 가끔은 이곳이 꿈인 것 같다.
나는 직장을 다닐 때는 마흔다섯 살로 살고, 고등학생 봄이와 등하교할 때는 잠이 부족한 열여덟 살로도 살고, 겨울이와 장난칠 때는 열한 살로도 살고, 귀가 잘 안 들려서 보청기를 하신 어머님과 얘기할 때는 일흔 살로도 살고, 대학교 친구를 만날 때는 스무 살처럼 살고, 덕질을 할 때는 열다섯 살인 것처럼 금사빠 소녀로 산다.
시간은 계속 흐르겠지만 열세 살의 나도, 스무 살의 나도, 마흔다섯 살의 나도, 여든 살의 나도 아마 지금의 마음을 가진 나일 것이다.
살다 보면 나 혼자만 제자리인 것 같고 막막하고 가끔 두려워질 때가 있다. 그럼 잠시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책이나 강연, 음악, 영화, 드라마를 통해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도 받고 걱정이 덜어지기도 한다.
어른이 되면서 서른을 마주하고, 다시 마흔을 마주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 앞에 선 내가 어른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스무 살 때는 서른이면 당연히 누구나 철든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마흔이면 삶의 중심을 잡고 뭐든지 다 척척해내는 어른이 저절로 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막상 서른이 되어보니 아기 엄마였는데도 마음이 어린 철부지였고, 막상 마흔이 지났는데도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미숙한 어른으로 살고 있다.
서른의 어른도 당연히는 없었고, 마흔의 어른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었다. '어제의 나'가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여서 '오늘의 나'가 되었을 뿐이다. 그 어디에도 공짜는 없었다. 다만, '내일의 나'는 자주 찾아오는 그림자에도 부스러진 마음을 잘 다지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당연히 어른인 척 살고 있는 나는 어쩌다 어른으로 살고 있으면서 행동은 철든 어른인 척하다 보니 가끔 사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너무 어른인 척 애쓰지 말고 살아야겠다. 나이가 들면서 아픈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일을 애써 외면하지 말자.
마음이 한없이 나약해질 때는 평온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마음속에 절 하나 지어놓자. 다시 허물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