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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일상 Oct 27. 2023

인연 2

일상 11. 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인간에 대해 쓰라


"Man(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man(한 인간)에 대해 쓰라." < E. B. 화이트 >


은유 작가님의 책 '쓰기의 말들'을 읽었다. '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인간에 대해 쓰라'는 문장을 읽고 '한 인간'이 생각났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기억을 되짚어서 [인연] 그 이후를 기록해 본다.





그 해 1997년.


4월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즈음의 기억은 많이 삭제되었다. 전혀 준비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이었기에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버거웠다. 아빠와의 이별을 몽땅 삭제해야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97년, 여름



얼굴도 모르는 채로 편지만 주고받다가 군인 아저씨를 실제로 만난 건, 그 해 1997년 뜨거운 여름, 서울에 있는 고속 터미널이었다.



어떻게 만났는지의 과정은 기억이 안 난다. 그는 각 잡힌 군복을 입고, 각 잡힌 모자를 쓰고, 누가 봐도 군인인 휴가 나온 군인 아저씨로 서있었다. 그와 마주 서 있는 나는 더워서 볼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하얀 티셔츠와 멜빵 청바지를 입은 누가 봐도 학생이 그 무수한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한복판에 서 있었다. 헤어지는 그 찰나의 장면에 내 손에는 하얀 여름 샌들이 담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집에 쇼핑백을 들고 오자 엄마가 궁금해하셔서 보여드렸다. 미신에 진심인 엄마가 한 마디 툭 건넨다.


"신발을 선물로 받게 되면 그거 신고 떠난다는 말이 있더라."


엄마가 말한 우려 섞인 그 미신처럼, 그 후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다가 우리의 인연은 또 한 번 끝나 있었다.









2001년, 여름



내 삶에서 이제는 삭제되었다고 생각했던 군인 아저씨로부터 어느 날 이메일로 편지가 왔다.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 내 눈을 의심하게 했다.



'어... 설마.. 그 아저씨? 그런데 내 이메일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갑자기 이메일은 뭐지..'



난 바로 휴지통에 넣을까 하다가 어떻게 나를 찾은 것인지가 궁금해져서 클릭해 보았다. 그 군인 아저씨가 맞았다.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장을 안 쓸까 하다가 마음이 불편해졌다. 간단히 답장을 써서 메일로 보냈다. 잘 지내고 있으니 연락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다시 나를 찾게 된 계기는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지금의 본인이 마주한 상황이 그때의 나를 생각나게 했다고. 스무 살에 갑자기 아빠의 죽음을 마주하고 더 이상 펜팔 하지 않겠다고 했던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불현듯 궁금해졌다고. 펜팔이 끊긴 지 한참 지났기에 우리 집 주소도 바뀌었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삐삐는 사라지고, 내 이름과 학교 이름으로 '아이러브스쿨'에 들어가 일일이 검색해 보았다고 했다.



군인 아저씨는 그렇게 4년 만에 이메일로 긴 편지를 보내왔다. 그날 처음부터 수신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어땠을까. 선택은 후회랑 짝꿍인가 보다.





2023.10. 20 꿈꾸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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