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부모를 떠나지 않는다.
“오빠, 아버지가 정말로 허락하신 거야?”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하는 우찬을 보며 연숙은 우성에게 물었다. 여전히 우성은 우찬을 설득하고 있었고 연숙은 용진의 판단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오빠들 일은 오빠들이 알아서 해 볼게. 막둥이는 걱정하지 말고. 학교는 잘 다니고 있지?”
“응, 찬이 오빠가 맨날 학교 데려다주고 출근해.”
“찬이가 데려다주기까지 해?”
“응! 가끔은 데리러 오기도 하는데?”
우성은 더 이상 흠잡을 데 없는 우찬을 결국 인정해주기로 했다. 자신들끼리 했던 여동생을 언제나 행복하게 해주자는 약속을 아주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어 연숙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다. 오빠들을 졸라 산 시집들은 어느새 책꽂이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시집이 좋냐?”
“읽으면 정신이 정화된다는 게 뭔지 알아?”
우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등 뒤에 숨겼던 시집 한 권을 연숙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너가 좋아하는 시집이지.”
“처음 보는 작가인데?”
“일부러 그 사람으로 샀다. 오빠가 시집에 대해 뭘 알아야 골라보지. 네가 없는 시인의 시집 하나 샀다.”
연숙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우찬이 사준 시집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시집을 다 읽고 나서도 언제나 손에 들고 등교를 하고 하교를 했다. 어느날 집에 하교했을 때는 신발장에 여자들이 신는 신발이 하나 놓여져 있는 걸 보았다.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가니 우성과 우성의 여자 친구인 주하, 우찬이 있었다.
“지금 이 분위기는 뭐야. 찬이 오빠는 표정 좀 풀어. 누가 보면 심문하는 것 같잖아.”
“느그 첫째 오빠 딱 걸렸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동생들한테 좀 알려주지.”
우성은 부끄럽다는 듯 주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우찬과 연숙은 질색을 했지만 속으로는 본인들이 연애하는 상상을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우찬에게도 민선이라는 연인이 생겼고 연숙만 홀로 남자 친구 없이 대학을 다녔다.
“연숙아, 오늘 동기들끼리 볼링 치러 갈 건데 안 올래?”
“딱히 끌리지는 않는다.”
“다른 대학 애들이랑 같이 치기로 했는데 새로운 친구들도 만들 겸 와 봐.”
연숙은 어쩔 수 없이 동기들의 손에 이끌려 볼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현을 만나게 된다. 석현은 연숙이 하는 모든 행동에 격하게 호응을 해주었고 이들은 이후로도 자주 만나 볼링을 치곤 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인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때 우성이 주하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설날에 용진과 선화의 앞에서 발표했다.
“갑자기 웬 결혼이냐.”
“아버지께 말씀 안 드렸죠? 공사 합격했습니다. 결혼도 서둘러서 하려고요.”
선화는 경사가 났다며 활짝 웃었고 용진은 말없이 용진의 어깨들 토닥였다.
“왜 먼저 말 안 했어.”
“아버지, 한 번에 좋은 일들만 알려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섬의 가족에게는 명절에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첫째인 우성이 결혼을 하고 얼마 안 가 중고차 사업으로 확장했던 대찬 역시 벌이가 넉넉하자 민선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성격도 좋은 민선은 용진과 화선의 눈에 금방 들었고 결혼으로 이야기가 금방 흘러갈 수 있었다.
3년 뒤 대학을 졸업한 연숙 역시 석현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동생의 결혼에는 용진보다도 우성이 가장 먼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우성이 반대를 하니 용진은 아무 말도 안 했고 막내의 결혼을 응원하던 우찬은 눈만 껌벅일 뿐이었다.
“너, 술 좀 하냐?”
“매우 잘 합니다.”
석현의 단호함에 우성은 콧방귀를 뀌며 석현을 데리고 마루로 나갔다. 그리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두 남자의 이야기, 오빠와 남자 친구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우성이 하고자 했던 말은 연숙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공단을 나와 다른 회사로 취직하는 것이었다. 우성은 그 길이 힘들다는 걸 알기도 했고 술기운에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성의 생각은 고등학교 1학년 우찬의 일부터 시작해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정확하게 반년 후 석현은 공사에 취직했다며 다시 자신 있게 명절에 연숙의 가족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결혼하겠습니다.”
“아, 아니. 잠, 잠깐만. 아, 아버지의 말씀이 당연히 우선이 되야지.”
그러나 용진은 연숙을 칭찬했다.
“어디서 이런 멋진 남자를 데리고 온 거야. 나는 허락하마.”
용진의 허락에 결혼은 금세 진행되었다. 용진의 막내딸의 결혼이라며 드레스를 직접 골라주겠다고 하였고 분홍색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드레스를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로 정했다. 연숙은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골라준 드레스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혼 축하해. 자네는 우리 숙이를 잘 부탁하고, 숙이 너도 언제나 석현이를 사랑하고.”
막내딸의 결혼식에 용진과 화선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며 석현에게 막대한 부담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우찬은 옛날 주먹 대장이란 별명에 어울리게 반 협박으로 석현에게 연숙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또 다른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연숙이 결혼하기 1년 전 삼 남매는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직에서 물러난 용진을 육지로 모셔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결혼을 한 두 사람에게 여유 자금은 없었고 고스란히 막내인 연숙이 돈을 대야 했다. 그럼에도 연숙은 괜찮다며 일단 아버지를 설득하기로 했다. 당연히 그 역할은 맏아들인 우성의 역할이었다.
“아버지, 섬에는 언제까지 지내시려고 그래요?”
“섬에 있는 게 뭐 어때서 그러냐.”
“나이도 드시고 하면 병원도 자주 다니실 거예요. 그때는 섬은 무슨 일어날지 몰라요.”
“그래도 나는 딱히 갈 생각이 없다.”
우성은 용진이 바라보는 송도 건너편의 무인도를 함께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이상 하실 것도 없으시잖아요. 학교는 올해가 마지막이기도 하고요.”
송도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없다.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2명을 끝으로 송도의 초등학교는 폐교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용진은 자연스럽게 교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나중에 생각하면 안 되곘냐?”
“안 돼요. 지금 결정하셔야 해요. 숙이가 모은 돈이랑 아버지 돈으로 집 한 채 사려고 해요.”
“어떻게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그렇게 매몰차게 떠날 수 있겠어.”
“아버지, 이 집을 떠나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는 육지에 있는 집에 계시다가 가끔 여기 오셔서 지내시면 되죠.”
화선은 그런 용진이 답답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언제 어디가 아파도 이상하지 않다. 화선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육지로 가야 한다고 말했고 용진은 화선의 말에 고집을 꺾었다.
“만약에 가게 되면 집은 어디로 할 생각이냐.”
“순천역 앞으로 할 생각이에요. 송도랑도 최대한 가깝고 또 서울이랑도 가깝게요.”
용진은 하는 수 없이 역전 집에 사는 걸 허락했다. 결국 자식들이 자신을 위해 깊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성과 우찬, 연숙이 섬을 떠나고 용진은 섬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 화선이 깎아주는 참외를 먹으며 말했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났나.”
“무슨 말이오.”
“벌써 집까지 장만할 수 있을 정도로 애들이 자랐냐는 거지.”
“이게 다 육지에 빨리 보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결국에는 우성이고 우찬이고 옳았네.”
화선은 참회 하나를 포크로 콕 집어 용진의 입에 넣었다.
“그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나 봐요.”
“그런가 봐. 이미 그때부터 어른이었나 봐.”
“그러니까 당신도 애들이 하자는 대로 이제 움직여요.”
“곧 있으면 숙이도 결혼한다고 결혼 상대를 데리고 오겠지.”
섬의 아이들이 떠난지 15년 만에 모두가 새로운 가족을 꾸렸다. 그렇다고 섬의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 어느 가족보다 끈끈하게 자주 모이며 용진과 화선을 걱정시킬 일은 없었다. 용진은 그렇게 섬의 집과 함께 역전 집이라는 새로운 집으로 이동하면 곧 송도의 언더 위에 있는 집에 불이 켜질 일은 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