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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riter Sep 08. 2023

13. 선생님도 운다


지난 5년간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문법을 가르친 건 티칭 첫 학기뿐이었다. 그때도 학생들의 과제를 보고 필요하다 싶은 부분만 골라서 보충하듯 수업을 했다. 그런데 이 학교로 오고 나서 수많은 워크숍 중 grading calibration이라고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성적을 매길 수 있게 조정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보니 문법을 많이 따지는 분위기였다. 문법 오류가 많을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 선생님들이 그 부분에 있어서 더 엄격하게 채점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채점을 할 때 크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법을 가르치지 않는 게 말이 안 된다 생각해서 문법을 다루기는 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만년 문법강의를 해봐야 지루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에 학생들이 문법의 요소들을 맡아서 공부하고 파워포인트로 준비해서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기회를 갖게 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기회만큼 무언가를 잘 공부할 기회가 어디 있겠냐며 스스로를 칭찬하며 학기를 시작했다.


첫 발표들은 다들 꾀 준비를 잘해왔다. 설명도 꽤 잘했고, 예문도 잘 골라와서 설명하는 문법요소들이 이해가 곧잘 됐다. 연습문제도 학생들이 준비를 잘 해와서 재미도 갖춘 좋은 학습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설명을 잘 못하는 학생들의 발표도 내가 좀 도와주면서 같이 배워나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렇게 발표자가 힘들어하는 건 듣고 있는 학생 중 어려워하는 학생이 있으면, 아,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맘 편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주는 유독 수업시간에 발표를 맡은 학생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수요일 아침은 오늘 발표를 맡은 ㅇㅇ인데 family emergency가 생겨서 오늘 학교를 못 가는데 발표를 어떻게 하면 좋냐는 질문의 이메일로 시작되었다. 원래는 지난 시간에 발표를 했어야 하는데 내가 깜빡하고 발표를 못 시켜서 수요일로 밀린 학생이었다. 짝이랑 같이 발표를 하는 팀이어서 어떻게 할지 15분간 고민을 하다가 제때 발표를 못한 데에는 내 잘못도 있어서 다음시간에 할 수 안내를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학생들이 과제를 잘 못 알아들어서 같은 발표를 두 명이 따로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업에 온 짝꿍은 예정대로 발표를 했고, ㅇㅇ이는 다음시간에 발표를 하기로 했다.


연이어 있는 수업에서는 발표자가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오지 않아서 화면에 띄워놓은 파워포인트를 읽는데 그쳤다. 그다음 발표자는 발표자료에 오탈자가 너무 많아서 내용 전달이 어려운 수준이었다. 개강 전에 참여한 여러 미팅과 워크숍의 지침에 따라 못해도 많은 칭찬을 해주면서 뭐가 잘못됐는지 지적을 해줬다. 나는 타고난 잔소리쟁이다. 학생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수요일의 큰 과제는 잔소리를 예쁜 말로 격려와 칭찬으로 포장해서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날의 마지막 수업에서의 발표자 **이 덕분에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는 이미 화요일 오피스아워 때 따로 면담을 하면서 이해하지 못한 작은 부분을 물어보고 간 학생은 파워포인트도내용이 한눈에 잘 보이도록 예쁘게 잘 꾸며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크게 걱정은 안 했지만 발표를 너무 잘해서 선생님으로서 엄마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불그스름해진 얼굴과는 달리 **이는 똑 부러지는 설명과 적당히 빠른 페이스로 관객인 친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간단간단한 연습문제로 매 항목을 확인시키고 넘어갔다.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풀어볼 문제를 주면 충분한 시간을 주려는 나는 오히려 수업진행의 속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발표자료를 수업시간 전에 이캠퍼스에서 다운로드한 후 학생이 발표하기 좋게 준비하는데 제출된 과제가 없었다. 오늘 발표를 하기로 한 @@이는 지난 시간에 나를 찾아와 발표 신청지 sign-up sheet에 이름을 아직 쓰지 못했다고 했고 그래서 유일하게 비어있던 오늘의 발표를 맡기로 했는데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며 투덜거리면서 나갔다. 그래도 이틀의 시간이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분량이었고, 덜 어려운 부분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제를 이캠퍼스에 아직 제출하지 못했으며 와이파이 연결도 안 되고 USB도 없어서 파일을 옮길 수 없다고 했다.


사실 거기서부터 기가 찼다. 오늘 발표를 하기로 했고 원래는 수업시간에 오기 전에 제출하는 게 원칙인데 그 조차도 못했다고 해서 도대체 준비를 어떻게 한 건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도 침착하게, 그럼 화면 없이 발표를 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구부정하게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읽기 시작했다. 화면도 없는 상황에서 모노톤의 목소리로 대충 읽는 발표는 발표가 아니다. 그래서 파워포인트를 준비해 온 학생들 중에도 그냥 읽는 학생들이 있어서, 그걸 자기식대로 풀어서 설명을 해달라고 하기도 했으니, @@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상냥히 말했다. 그랬더니 학생이 하는 말: 설명해 줄 수 없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웃으며, 응? 설명해 줄 수 없다고? 그게 발표자의 과제인데?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며 웅얼거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럼 시간을 더 주면 잘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럴 수 있다며 웅얼거리는데 한 대 때려주고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프로답게 (이게 진짜 프로다운 자세였는지는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엄한 목소리로 그럼 다음시간까지 제대로 준비해 와서 다시 하자고 했다.


그렇게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는 몇 초 사이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냥 빵점을 줬어야 하나, 내가 상황에 대한 대처를 제대로 한 게 맞나, 이러면 다른 애들도 굳이 제때 제대로 준비해오지 않으면 어쩌지, 이 순간에 내 권위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물밀듯 몰려와서 정신이 살짝 혼미해졌다. 그 와중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일단은 쿨하게 웃어 보이는데 집중했다. 그럼, 다음시간에 @@이의 발표를 듣자며 싱겁게 강의 내용으로 넘어갔다.



강의를 하는 내내 고민했다. 이런 돌발상황에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학생에게 면박을 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하는 건 옳지 않다는 걸 가르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으면서 충분히 엄하게, 그러나 학생의 기가 죽지 않게 대처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보면 내가 얼마나 초보 선생님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전문대에서의 이 티칭 기회가 너무 소중하다. 일주일에 10번을, 총 15시간을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교류한다. 이렇게 한 학기만 시간이 쌓여도 거의 240시간이란 어마어마한 시간이 쌓인다. 그만큼 다양한 돌발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적당히 근엄하게, 적당히 친근하게 그때그때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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