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1.
"아빠. 아빠는 향년 몇 세야?" 오늘 하루 뉴스를 채운 안경 쓴 남자의 비보를 보며 아들이 묻는다. 이 천진한 물음에 가장은 하회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향년은 죽은 사람 나이에 붙는 말인데, 아빠한테는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되겠제?"
되묻는 말에 당황하는 어린 나. 하지만 꽤 영악한 초등학교 2학년은ㅡ위에서 언급한 희극인 이주일 씨의 사망 시기가 2002년이더라ㅡ막연한 부끄러움과 동시에 어떻게 해야 다시 똑똑한 아들이 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럼 뭐지? 나이는 친구들한테 쓰는 말이고, 연세는 너무 높은데.' 이 시기 곧잘 읽던 위인전에서 자주 나오던 '방년'이라는 단어도 스치지만, 이미 비슷한 단어에 당한 어린이는 한참을 고민한다. 그러다 긴 침묵을 깨고 다른 책에서 봤던 단어, 아니 문장을 끄집어낸다. "그럼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이번엔 입을 크게 벌리고 너털웃음을 치는, '춘추'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너무 젊었던 아버지. "니는 그런 말을 또 어디서 들었노, 희한하네." 라며 아들이 원하던 칭찬을 건넨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어머니도 "저번에 골든벨 50번 문제도 맞추던 거 봐라, 치원이는 아가 똑똑하다니까." 라며 한 마디 거든다.
원하던 평가를 쟁취한 어린 나는 책에서 보았다며 머쓱해하다가,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그 책이랑, 옥편 좀 들고 온나." 라는 말에 재바르게 움직인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단어를ㅡ특히 한자를ㅡ뜯어보는 습관은 내 현명한 아버지가 물려준 소중한 문화자본이다. 그 덕에 어릴 적부터 '글'을 읽는 나의 해상도는 늘 선명하기만 하다. 아, 물론 영어에 대한 것은 물려주지 않으셨다. 알파벳만 보면 얼어붙는 모습도 부전자전인 모양이다.
2.
나이를 나타내는 표현이 참으로 다양한 나라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것만 살펴보아도 그렇고, 심지어 그 모든 표현에 은유적인 맛이 있다. 사는 동안 누렸던(享 누릴 향) 세월이라는 뜻의 '향년(享年)'이나 젊은 여성의 나이를 수식하는 방년(芳年, 芳 꽃다울 방)도 물론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춘추(春秋)야 말로 동양식 메타포의 정수다.
전근대적 국가가 모두 그랬겠지만, 특히 농업제일의 기치 아래 국가를 경영한 동아시아에서 봄과 가을은 상당히 상징적인 계절이다. 아랫목에서 동치미 국물을 떠놓고 노름이나 했을 겨울과 달리, '봄'은 생업이 시작되는 파종의 시기요 '가을'은 그 결실을 거두어 다음 가을까지 버틸 양식을 수확하는 가장 중요한 계절이었다.
이게 내가 생각한, 봄과 가을을 엮어 한 해를 이르는 '춘추(春秋)'라는 단어의 형성 논리다. 지금 보니 '올해 선생님의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라는 표현은 당시 사회상을 담은 거울 같은 말이자, 당신이 겪은 봄과 가을을 반추해 들려달라는 자못 낭만적인 문장이다.
동시에 이것이 20년 전 아버지가 건넨, 나이를 왜 봄이랑 가을로 세는지 생각해보란 질문의 답이다. 꽤 간단한 이 숙제를 키도 가방끈도 아버지보다 더 자란 이제야 끝냈다. 이번에 청송에 올라가면 보여드려야겠다.
3.
이 나라의 나이에 대한 표현 중 흥미로운 점 하나 더. 수직적인 구조를 보이는 높고 낮음으로써의 나이다. 이 고고한 유교 국가권에서 나이란 곧 예(禮 예절 예)의 기준이기에, 나이에 대한 표현을 '많고 적음'을 넘어 '높고 낮음'으로도 표현한다.
가령 우리가 널리 쓰는 '연령'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연령이 높은 편이다'라는 문장은 자연스럽지만, '연령이 많다'라는 표현은 똑똑한 맞춤법 검사기를 만난다면 여지없이 걸러질 표현이다.
덕분에 나이의 많고 적음만을 판단할ㅡ혹은 그 자체가 크게 중요하지 않을ㅡ외국인들이 한글을 어려워하는 이유도 알겠고, 길거리 싸움에서 "너 몇 살이야?"가 먼저 튀어나오는 우리네 밤길의 모습도 괜스레 납득이 간다.
4.
사실 나이와 관련한 표현 중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따로 있다. 위에서 말한 춘추도 꽤 멋지지만, 그것을 버금으로 만드는 으뜸은 단연 '나이테'다.
나이테는 영어나 라틴어도 아닌, 순우리말 표현이다. '나이'에 물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테'를 붙여서 만든 복합어다. 쌍떡잎식물의 줄기 속에 한 줄씩 새겨져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가늠케 하는, 2002년의 내가 "간격이 좁은 쪽이 북쪽"이라고 책에서 보았던 그 나이테다.
표현적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나이테라는 단어가 더욱 낭만적인 연유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무를 베어 중심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절대 보이지 않으니까.
또, 사람처럼 '빠른 94'라거나 '주민등록이 늦어져서'라는 둥의 복잡한 셈법을 떠나 충실하게 새겨진다는 점도 그렇다. 흔히 말하는 '한국식 나이'가 폐지되고, 늘 우리를 멈칫하게 만들던 '만 00세'라는 단위가 곧 우리네 나이 표현이 된다는데, 사람도 그냥 나이테로 표현하면 차라리 편할까 싶다.
선생의 나이테는 몇 겹이십니까? 아, 제 나이테는 선명한 스물일곱 줄과 희미한 한 줄입니다.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동시에 낭만적인가.
아, 내 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되면 근시일 내에 나이테를 없애는 성형수술이 생기는 게 이 낭만 없는 행성이다. 역시 낭만은 이미 새겨진 나이테 속에서만 찾을 수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