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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n 08.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ㄷ

다예(혹은 다례, 그리고 다도)

1.

  "음..." 말이 늘어지고 눈동자는 길을 잃는다. 오늘만 세 번째로 온 카페에서 남자는 더 이상 커피를 마실 생각이 없다. 아니, 몸이 없다. "음..." 이윽고 천장과 맞닿은 메뉴판 위를 정처 없이 떠돌던 눈이 멈추더니, 입에서 난생처음 불러보는 이름이 나온다. "보이차 하나 주세요." 장고 끝에 고른 이 차는 어떤 맛일까. 대충 녹차의 사돈의 팔촌쯤 되겠지. 아, 그건 남인가?


"1년 넘게 오면서 차는 처음으로 마시네?" 공연한 생각을 끊고 들어오는 코멘트. 역시 사장님은 섬세하다. 내가 단골이 된 이유가 있지. "근데, 보이차 먹어본 적 있나?" 주인장의 꼬리 질문에 젊은 단골은 "오늘 커피는 안 당겨서요. 저 바깥 자리에 앉을게요." 라며 괜히 다른 카페를 들쑤시고 다닌 오늘의 자신을 감춘다.


그렇게 도망치듯 문을 여는, 코가 조금 길어진 청년을 붙잡는 노신사. "그럼 여기 앉아 봐라. 적어도 처음 마시는 차는 제대로 배워야지." 오늘은 또 어떤 재밌는 걸 배울지 기대하는, 뒤를 도는 청년의 얼굴에 직전의 멋쩍음은 오간데 없다.


멋지게 늙은 남자는 자신과 닮아 고고한 나무 집기와 도자기들을 꺼낸다. "이렇게 차를 내리는 도구들을 통틀어서 다구(茶具)라고 하고, 하나마다 그 역할이랑 그에 맞는 이름이 있는데" 청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도구, 아니 다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이건 다반, 저건 숙우. 그리고 여기 손잡이 달린 게 다관." 말에 맞춰 한자들이 테이블 위를 뛰어다닌다. 다반은 소반 반(盤), 다관이랑 숙우는 영 감이 안 오네.


그렇게 학생이 다구와 한창 씨름을 벌이던 , 맞은 편의 선생은 드디어  물이 우러난 다관을 들어 올린다. ', 드디어 먹어보네. 향은 그냥 평범한데?' 그러나 김칫국이 가득한 학생의  안에  들어올 자리는 없다.  따뜻한 흑갈색의 액체는  개의 잔을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더니, 대부분 다반 아래 퇴수기로 들어간다.


"왜 그런지 궁금하제?" 웃으며 묻는 노신사에게 청년은 크게 뜬 눈으로 먼저 화답하고는, "찻잔도 데우고, 한 번 거르려고 하는 거죠? 다도는 신기하네요." 라며 나름의 논리를 덧붙인다. 노신사는 웃으며 "처음이라더니, 잘 아네." 훗, 이래 봬도 제가 동네 신동이었습니다. "근데 하나는 틀렸네." 휴, 아직 어느 동네인지 말 안 했으니 망정이지. "이건 다도(茶道)가 아니라 다예(茶藝)라고 하는데, 무슨 차이인지 아나?" 아, 저는 신동도 천재도 아니고 그저 둔재 중 하나였나 봅니다.


이후에도 두 시간을 넘게 차를 마시다 떠난 나는 어느덧 커피보다 차를 더 많이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북성로의 자그마한 카페에서 수학한 학생이 어느덧 본인만의 다구도 마련했다. 거기에 똑같은 찻잎을 수확해 볶으면 녹차, 찌고 말리는 시간에 따라 우롱차와 홍차, 보이차가 된다는 세상의 진리까지 깨우친 우수한 졸업생이다.


제자는 곧 본인의 스승에게 찾아가,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차를 옆에 끼고 수다를 떨어볼 요량이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아, 이건 정산소종입니다. 노골적인 훈연 향이 매력적인 친구지요. 같이 마시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정산(正山)은 원조라는 뜻이고, 소종(小種)은 작은 잎을 가진 종자란 말 맞지요? 그러게요, 풀어보니 원조할매국밥 같은 이름이네요. 아, 노포 좋아하는 버릇이 여기까지 번졌나 봅니다. 그럼요, 그래서 제가 여기 단골이잖아요.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한 지붕 한 가족이었습니다


2.

  우리가 흔히 '다도(茶道)'라고 부르는 차(茶) 문화는 일본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와 관련된 예절'이라는 뜻의 '다례(茶禮)'라는 단어를 쓰고, 위에서 언급한 '다예(茶藝)'는 재주를 뜻하는 한자(藝, 재주 예)와 차를 짝지어 놓은 중국의 문화입니다.


한자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 세 나라의 차를 대하는 관점이 묘하게 다릅니다. 일본은 일종의 수행과 의식으로, 우리나라는 예절의 차원에서 차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중국은 앞선 두 나라와는 달리 보다 실질적인 행동이자 하나의 '기술'로 차를 대하는 듯합니다.


이는 박제된 문자를 넘어 차를 즐기는 모습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다도는 엄격한 형식에 뿌리를 둡니다. 정석대로 한다면 '물을 끓이는 숯불과 다구를 감상하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다예는 적절한 온도로 찻잔을 데우며 첫물을 버리는 '세차(洗茶, 씻을 세)'를 제외하면 형식의 구애를 크게 받지 않습니다. 외려 '차 그 자체를 즐기는 것'에 온전히 집중한 모습이지요.


물론 각 문화를 구분 지어 어느 것이 뛰어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마 다도나 다례로 차의 세계에 입문했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말을 이어 나갔겠지요. 그저 조금이라도 더 익숙한 것이 편할 따름입니다. 꾹꾹 눌러 적고 있는 생각들은 외려 앞 단어인 다(茶)ㅡ동시에 '차'라고도 읽지요ㅡ에 대한 것입니다.



3.

  차는 저에게 둘도 없는 단짝입니다. 만난 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이 치와 이토록 붙어 다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가 저를 닮았기 때문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가 그를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차와 저의 닮은 모습을 꼽자면, 느긋함ㅡ 여유롭다는 것은 다소 물질적인 느낌이고, 저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으니 느긋함이란 표현이 가장 좋겠습니다ㅡ입니다. 찌고 말린 어린잎이 따뜻한 물과 어우러져 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느긋함'이란 단어를 더운물에 잘 개어 놓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매사에 느긋한 인간이지요.


당신이 혹 성격 급한 아무개를 괴롭히고 싶다면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면 될 일입니다. 끓인 물을 식히고, 기껏 우려낸 첫 물을 버리는 시점부터 가감 없이 그의 불같은 성미가 드러날 겁니다. 이후 오랜 시간 끝에 받은 차 한 잔을 천천히 즐기고 두 번째 차를 내리려 할 때쯤, 맞은편에 앉은 그는 이미 사라진 후겠지요.


  닮고 싶은 모습은, 문장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커피보단 차처럼 늙고 싶다'는 말을 함축할 한 단어가 제 깜냥으로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커피는 높은 압력과 뜨거운 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나면 찝찔한 찌꺼기만 남아 버려집니다. 다시 말려 탈취제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윤기도 향기도 로스팅 직후의 충만했던 그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반면 차는 최소 세 번까지 우려냅니다. 세 번이 뭡니까, 이론상 무한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점은 그 횟수가 아니라, 거듭 우려낼 때마다 느껴지는 맛이 ‘더하고 덜함’보다는 제각기 고유한 맛이라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차는 벤자민 버튼과 같습니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그 분이 맞습니다. 색도 맛도 가장 진한 처음은 연륜이 쌓인 노승과 같고, 맹물과 다름없는 마지막쯤엔 동네 아이처럼 순박하지요. 하지만 몸과 마음의 나이가 비대칭인 브래드 피트의 모든 모습에서 우리가 눈을 떼지 못했듯, 차 또한 각 회차마다 마시는 이에게 선사하는 고유한 맛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하든 연하든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나이가 들고 싶습니다.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희미해지기보다는, 은은하되 확실한 무언가가 늘 느껴지는 중년과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특히 은퇴식에ㅡ90년대생의 은퇴는 과연 몇 살일지는 모르겠으나ㅡ참여한 저는, 남들의 눈에 더는 뽑아낼 것이 없는 커피 찌꺼기만큼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냉장고 한편에 탈취제로 머무르기보단, 여전히 더운물을 받아내며 가치를 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제가 차를 아끼는 이유이고, 거의 맹물이 되기까지도 여전히 차를 우려내는 이유입니다.


사실 사려던 것이 품절되는 바람에 시작한 글입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4.

  물론 저는 커피도 마십니다. 다만, 커피는 생존을 위한 자양강장제의 개념입니다. 집중력이 온데간데없거나, 과음한 다음 날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용례입니다. 멍한 상태에서 위장을 타고 흐르는 커피는 접신한 듯 장구와 꽹과리를 치는 상쇠가 되어 저를 일터로 복귀시켜줍니다. 휴식보다는 오히려 채찍과도 같은 느낌이지요. 반면 차는 진정한 의미의 '차 한잔'이자, 마시는 휴식입니다. 느긋한 내가 온전히 느긋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술입니다.


일본의 다도(茶道)에서 도(道)는 길이라는 뜻도 되는데, 이에 빗대자면 커피는 고속도로입니다. A부터 이어진 똑같은 아스팔트를 따라가면 최단 시간에 B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이지요.


다만, 저는 여기부터 저기까지 이어진 산길이 더 좋습니다. 바닥엔 흙과 바위가 있고, 고마운 누군가 만들었을 돌층계가 놓인 길을 더 사랑합니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계절마다 다른 향과 풍광이 있는, 뒷짐 지며 걷다 중간에 멈춰 한 숨 돌릴 수 있는 길을 아낍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길을 차(茶)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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