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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Nov 27. 2022

가을꽃은 봄꽃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둘: ㄹ|란(또는 난)

1.


  "어, 거기 앉아." 언뜻 보아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B가 말한다. 노크한 손을 멋쩍게 들고 있던 A는 네, 하고 대답하며 검은 가죽이 꽤 멋진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러자 B도 소파에 앉고는, 협탁 위의 화분을 만지작대며 "그래, 출근해보니까 어때?" 하고 묻는다.


퍽 긴장한 A는 "사무실 분위기도 좋고, 뭐든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기관장인 B의 대답을 기다린다. 이후 B는 기본적인 호구조사부터 시작해 지금껏 해온 일과 지원한 기업, 앞으로의 향방을 스물여덟의 과년한 인턴 A에게 묻는다. 그리고 대화 중 은근하게 새어 나오는 A의 답답함과 조바심을 느낀다.


그렇게 이어나가던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찾아오자, B는 만져대던 화분을 가리키며 말한다. "A씨, 이게 군자란이라는 종이야." 갑작스러운 자식 소개에 당황한 A는 "아, 이게 난인가요? 생긴 게 보통 난이랑은 다르네요." 하며 답을 하고, 그것을 들은 B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보통 난이란 게 다 그렇지만, 이 군자란은 특히 꽃 피우기가 더 어렵거든. 내가 여기 오면서 선물로 받았는데, 2년이 다 되도록 꽃은 소식이 없는 거야." 원래 꽃이 안 피는 게 아닐까요, 하고 조용히 속으로 생각한 A는 입을 벌려 "꽤 오래 소식이 없네요" 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찾아보니까, 잎이 열일곱 개는 뻗어야 꽃대가 올라오는 종이라네?" 하고는 화분을 A 앞으로 천천히 밀어내는 B. 그리고는 한 번 세봐, 하고 빙그레 웃는다. A는 공중에 점을 찍어가며 잎을 센다. 하나 둘 셋 … 아, 저 밑에도 하나. "작은 잎까지 딱 열일곱, 올해는 피겠네요!" 초면인 식물의 장래를 비관하던 A는 어느새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다.


그러자 "내가 보기에, A씨랑 이 난이랑 똑같아. 그러니까 먼저 자리잡은 친구들 보면서 쫓기지 마." 라며 A를 다독이고는, "이제 가서 일 봐, 다른 인턴 친구도 들어오라고 하고." 하며 말을 맺는 B. 이에 A는 감사합니다, 라며 인사한 뒤 차분히 문을 닫고,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대화를 복기한다.


그렇게 봄까지 열심히 양분을 축적하고 잎을 늘린 A는 그 해 가을에 꽃망울을 터트렸다. 먼저 핀 남들의 꽃을 보며 때로는 부러워하고, 때로는 좌절하던 A는 가을에 피는 꽃이었다. 그리고 가을꽃은 자신보다 먼저 피는 개나리나 벚꽃을 시기하지 않아도 됨을 A는 이제 알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찬바람이 날카로울 즈음에, A는 업데이트 알림이 뜬 B의 메신저 프로필을 본다. 사진 속 낯익은 화분 위에는 생경하지만 반가운 주황색 꽃 한 무더기가 소담하게 피었다.



2.


  어느덧 서른을 목전에 두다 보니, 동년배들의 현 상황을 명확히 이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밥벌이를 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래도 전자가 다수 그룹이고, 후자는 소수 그룹입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 여느 순간에서도 그랬듯이, 소수들은 쉬이 우울해지고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작년 봄의 저 또한 그랬습니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늦게까지 밥벌이를 못했고, 동시에 매일같이 늙고 약해져 감에도 저를 부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매일같이 지켜보던 때였습니다. 위의 비유를 빌리자면 저는 뿌리가 썩어 틀려먹은 화분이라고 여겼습니다. 때문인지 한해 중 가장 포근한 시기에도 평생을 통틀어 마음만은 가장 추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물을 주고 볕을 쬐었더니 결국에는 꽃대가 올라오고 망울이 터졌습니다.


결국 모든 동년배들은, 아니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화분을 키우는 중인 것 같습니다. 다만 생장속도와 개화의 시기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는 뿌리내린 토양의 비옥함이나 강수량과 일조량 같은 타고난 환경이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품종 자체가 가진 '때'가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어떤 화초든, 적당한 시기에 당신의 꽃이 화려하게 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의심해봐야 할 상황도 있습니다. 하나는 물 한 방울과 햇볕 한 점 주지 않으면서 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양분이 모자란 화초에서 꽃이 필리 없음에도, 한정 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때가 완전히 무르익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급하게 얼굴을 내민 봄꽃은 꽃샘추위에 봉오리 그대로 얼어 죽기 마련이지요.



4.


늦었지만 비로소 20대의 꽃을 피워낸 저는, 내년부터 꽤나 오래도록 길러야 할 30대의 꽃을 심고 있습니다. 이번 꽃은 특이하게도 콘크리트 속에서 피어난다는데, 열심히 양분을 모아서 좋은 때에 망울을 터트릴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모쪼록 다음 꽃인 내집마련이 소철나무 꽃은 아니어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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