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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Mar 15. 2023

장래희망은 없는데요, 삶의 목적은 있습니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둘: ㅁ | 목적

1.


  "다들 교실 뒤에 한 번 볼까?" 점심을 먹으면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재깍재깍 집으로 돌아갔을 나이쯤, 교탁에 가려 상반신만 둥둥 떠다니는 선생님이 말한다. 뒤돌아 보는 교실 뒤편의 녹색 게시판에는 어제까지는 없던 생경한 것이 붙어있는데, 고동색 부직포와 초봄에 막 돋은 옅은 잔디색 부직포로 어설프게 만든 나무다. 웬 나무?


선생님은 다시 앞을 보라며 주목, 하더니 "이번 시간에는 각자 사과 하나씩 만들어서, 뒤에 있는 나무에 붙이자" 하며 쨍한 색깔의 사과모양 포스트잇을 한 장씩 나눠준다. 그리고는 분홍색 분필로 칠판에 엇비슷한 모양의 사과를 그리더니, 흰색 분필을 고쳐 잡고 [이름:   생일:   장래희망:   ]이라는 세 단어 옆에 본인의 이름과 태어난 날,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루를 날려가며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앉힌다.


이윽고 다시 뒤로 돈 선생님이 "다 만들고 붙이는 순서대로 사탕 하나씩" 이라 선언하자, 늦게 적는 이에게 콜라맛 막대사탕은 주어지지 않음을 충분히 학습한 어린것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그렇게 끝이 지저분한 오래된 사인펜으로 이름과 생일을 얼른 채워 넣다가, 장래희망. 여기서 막혔다.


자, 어려울 땐 짝꿍부터 시작해서 앞자리와 뒷자리, 저 멀리 4분단까지 한 번씩 훔쳐보는 게 다음 순서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나니 축구선수부터 의사 선생님, 프로게이머까지 퍽 다채롭다. 옆자리의 아무개는 변리사라는 보고도 모를 단어를 적었기에,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음, 차라리 아빠라고 적어볼까?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은 흐르고, 야속한 선생님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꼭대기에 제출된 사과들을 옮기며 "자, 10분 남았다" 하고 말한다. 오, 이러다간 저 원통을 아무리 헤집어도 수박맛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결심이 선 나는 적어도 남이 적지 않은, 하지만 꽤나 그럴듯하게 멋진 직업을 꾹꾹 눌러 적고는 늦게나마 수확한 내 사과를 선생님에게 납품한다.


"치원이는 과학자네. 앞에 가서 사탕 가져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교탁으로 가있는 어린 나는 열과 성을 다해 통을 뒤지고, 플랜 C쯤 되는 딸기우유맛을 기어코 찾아냈다. 그렇게 쉬는 시간 동안 사탕 껍질과 한참을 씨름하며, '내가 과학자가 되면 꼭 잘 벗겨지는 츄O춥스 껍질을 만들어야지'하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게 과학자라는 장래희망을 급조했던 어린 나는, 2005년쯤인가에 과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몇십 개의 문제 중 고작 5문제를 맞히고는 시원하게 꿈을 접었다. 이후로 수도 없이 바뀌고, 또 어딘가에 적어냈을 그놈의 '장래희망'은 지금도 여전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2.


  학부시절의 막바지쯤 운이 좋게도 소위 '멘토링'을 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팔공캠프라 부르던 행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팔공산 중턱에 위치한 수련원에 고등학교 1학년 학급임원을 100명씩 초청해 소위 '진로코칭'을 해주는 행사였는데, 수당이 짭짤하기도 했으나 똑같은 질문을 한 번도 빠짐없이 받았기에 기억에 남는 경우입니다.


그 질문은 "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였습니다. 매 기수마다 물어보았으니, 적어도 15명은 하잘것없는 그 학부생의 미래를 나름대로 궁금해한 셈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제 꿈은 여러 문장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너무 길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아니, 장래희망이 뭐냐구요"라고 재차 고쳐 묻고는 했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장래희망'이라는 단어는 다분히 변질된 것 같습니다. '희망'이라 함은 꽤나 추상적이고 자못 커다란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앞에 '장래'라는 단어의 수식을 받으면 신묘하게도 '직업'이라는 비좁은 궤 안에 갇히게 됩니다. 이러한 협의의 희망은 으레 정규교과과정을 거치며 그 틀이 잡히는 듯한데, 아마도 대다수는 위의 일화처럼 어설픈 사과열매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직업적성검사와 매달 받아보는 성적표, 그리고 주변의 기대를 투영하며 '아, 나는 OO이 되어야겠다. 그러려면 XX과에 가야 하나? 그 과는 표준점수가 몇점이지?'하며 완벽하게 그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노력했겠지요.


물론 특정한 직업과 그에 연관된 소명의식이 삶의 목적인 이들도 많으며,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어릴 적에는 그들이 크게 부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입된 소명의식이나 장래희망을 가진, 혹은 그조차도 없는 사람들의 경우가 여전히 많아 보입니다. 특히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적당한 틀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있는 이들에게, 장래희망은 너무나도 서글픈 단어로 비칩니다.


사실 그들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나름의 행복을 원만하게 실현하는 일입니다. 다만 그것을 특정한 명사, 특히 정형화된 어떤 직업으로 표현하기에는 적잖이 애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한 직업을 고르는 일은 1교시동안에는 쉬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며, 설사 정하더라도 급하게 먹은 음식은 결국 체하기 마련입니다.



3.


  그래서 하고픈 말은, 우리 모두 장래희망이란 단어를 구시대에 남겨두고 오자는 것입니다. 원래의 의미와는 너무 멀어져서, 구체적이고 폭 좁은 그 희망이 외려 사람을 옥죄게 하니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그것을 대체할 단어까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번 글의 주제가 ㅁ(미음)이니, '목표'는 어떨까요? 한 번 뜯어봅시다.


목표(目標)의 사전적 정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실제적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제는 특정 직업을 뜻하는 장래희망과 비교하면 넓지만, 여전히 좁아 보입니다. 특히 그 대상을 특정하지 못했거나, 이루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좌절감은 장래희망의 그것과 결이 같습니다. 여러모로 대체재보다는 유의어에 가까운 것 같아 아쉽습니다.


마침 다음 플랜이 바로 보입니다. '목적'이 어떨까 싶습니다. 목적(目的)은 '이루려 하는 일, 또는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입니다. 목표가 나무라면 목적은 숲과 같습니다. 숲은 수많은 나무가 모인 것이고, 목적은 크고 작은 목표들이 지향하는 너르고 커다란 가치입니다.


혹여나 몇 그루의 나무가 고사하더라도 숲은 그 명맥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목표를 이루지 못함에 패배감을 느끼고 매몰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위에서 말했던 장래희망이니, 틀이니, 목표니 하는 것들은 결국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시대에서 "네가 쓰고픈 도구가 무어니?"라고 물은 꼴이라면, 앞으로의 우리는 "얘야, 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니?" 하는, 진정한 의미의 장래(將來)의 희망(希望)을 물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본연의 뜻을 잃은 장래희망을 목적이란 단어로 대신합시다. 다만 두 글자로 표현하면 음절의 수도 적고 자못 딱딱하니, '삶의 목적'이란 거창한 네 글자로 대체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4.


  그렇게 나름의 일장연설이 끝나고 나면 "그럼 삶의 목적은 뭔데요?" 하고 묻는 학생들도 꼭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꽤 복잡하다고 겁을 준 다음 아래와 같이 답변을 하곤 했는데, 듣고 나서 질린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이들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것인데, 실현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5가지야. 내가 하는 경제활동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면 하고, 그 경제활동으로 인해 18시부터 9시까지의 내가 침해받지 않는 저녁이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어. 또,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망설임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으면 하고, 가까운 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선뜻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었으면 해.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위해 상식적인 수준의 노력만 해도 충분한 일상이 이어지는 게 내 삶의 목적이야."


그러면 또 학생들은 "그걸 직업으로 바꾸면 뭘까요?" 하고 덧붙입니다. 이에 저는 "요즘 시기에 그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는 각종 공노비ㅡ그게 몇 급에서 시작하는 공무원이든, 어떤 공기업이나 공공기관 직원이든ㅡ가 가장 적합한 것 같다" 라고 대답하곤 했고, 학생들은 "재미없다" 며 자리로 돌아가고는 했지요. 저도 학생 때는 일과 재미가 양립하는 삶을 꿈꿨던 것 같아, 흐뭇하게 바라봤었습니다.


아무튼 그 추세는 몇 년이 지난 요즘도 여전해서, 지금의 저는 바라던 대로 공노비 나무를 심어 두고 열심히 키우는 중입니다. 나름대로 삶의 목적 5조를 충만하게 만족시키는 오각형의 직업, 아니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5조를 이루기 위한 더 적합한 도구가 보인다면 언제든 바꿔 잡을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정년도 보장되는 평생직장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말도 들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평생직장이라는 말의 색이 바랜 지는 꽤 오래되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생 어떤 명사로 우리를 국한하는 것은 이름 석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 쓰고 나니 요즘은 희망 직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아 엎었다가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꽤 늦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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