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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산송이 Nov 19. 2021

'정의로움'의 이중성

정의로움은 때로 오답일 수 있다

 바야흐로 22살, 한참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 중일 때 있었던 일입니다. 들어보셨겠지만, 사회복무요원 생활은 근무지가 어디냐에 따라 그 난이도가 천차만별입니다. 도서관, 학교 혹은 시청같은 곳은 "꿀무지(꿀 + 근무지)"라 불릴 정도로 근무환경이 편한 반면, 장애인센터, 주야간센터, 요양원과 같은 복지시설은 "헬무지(헬 + 근무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근무환경이 빡세기로 유명합니다.


요양원 근무 당시 자주 올라갔던 옥상입니다. 여기서 힐링받곤 했죠.

 전 빨리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준비하겠다는 목표 하에 지원자가 적은 요양원을 근무지로 선택했었습니다. 비록 제가 선택하고 들어갔던 요양원이었지만, 그 곳에서의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치매 노인 분들의 돌발 행동을 수시로 지켜보고, 나체의 어르신들을 휠체어로 옮기고, 온갖 잡일과 노동을 떠맡고...... 병무청 규정 속 "사회복무요원이 원내에 없다 하더라도 일이 진행되는 데 차질이 없어야 한다." 조항은 대체 왜 있는 것일까요. 제가 일했던 곳은 공익 없인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거기다 같이 일하는 복무요원 중 한 명이 정말 '골칫덩이'였습니다. 애초에 아파서 4급을 받은 게 아니라 독감으로 인한 체중감소로 엉겹결에 몸무게 미달 판정을 받았다더군요. 한 마디로 현역병이어야 했지만 운 좋게 복무요원으로 뽑힌 형이었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했습니다.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상황에서 허구한 날 술을 진탕 마시고 병가를 내고, 오토바이 타고 놀다 자빠져 연가를 내고, 심지어 코로나 발병 초 한창 코로나로 난리였을 때 병가를 쓰고선 그날 밤 서울로 술을 먹으러 갔다가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요양원이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제가 이야기하려는 그 날이 바로 그 형이 또 숙취로 병가를 낸 날이었습니다. 어르신들 목욕하는 날이라 하루종일 허리 빠져라 어르신들을 들어 옮기고, 그 와중에 사무 보조하고, 위험행동하는 어르신들 지켜보고, 분리수거하고 쓰레기 버리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오전부터 반어법을 남발하는 직원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는데, 골칫덩이 형의 부재와 요양원 특유의 거북한 일들이 겹치면서 제 화가 폭발해버렸습니다. 사실 화가 폭발한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군인신분인데 하라면 해야지 어쩌겠나요. 무엇보다 저는 트러블 일으키고 관계가 틀어지는 걸 피곤해해서, 친구들의 "시키는 대로 하지말고 병무청에 신고하고 뻐겨!" 와 같은 조언들도 늘 한귀로 흘렸습니다. 한 마디로 속으로 화만 잔뜩 쌓였지, 어디로 분출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죠.   


요양원 근무하면서 위급상황으로 인해 구급차도 타 본 적이 있습니다

 어찌저찌 근무가 거의 끝나가고, 드디어 음식물쓰레기만 갖다 버리면 퇴근이 목전이었습니다. 요양원은 5층이었고,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선 1층으로 내려가 건물 뒤로 나가야 했습니다. 지치고 어두운 표정으로 쓰레기차를 들고 밖으로 나갔죠. 그 때 실수로 음식물 쓰레기차를 끌다가 문 옆의 입간판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음식물 쓰레기가 많다보니 수레가 무거워 운전미스로 입간판과 부딪힌 겁니다.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엄청 중요한 걸 넘어뜨린 것도 아니고,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심한데다 내 손에도 음식물이 묻은 장갑이 껴 있으니 얼른 버리고 와서 돌아오는 길에 세우자.' 당시 건물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음식물쓰레기가 시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나 좋지 않으니 먼저 버리고 와서 손이 비면 세워야겠다, 싶었던 거죠.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입간판을 쓰러뜨리고 잠깐 주춤한 후 다시 음식물 쓰레기차를 끌고 걸어가는데,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30살 초반 되어보이는 직장인이 저에게 대뜸 시비조의 말을 건네는 겁니다. "저기요, 지금 뭐하세요. 저거 안 세우세요?" 순간 당황해서 "네?" 하고 되물었더니, 저의 행동을 도저히 못봐주겠다는 찌푸린 얼굴로 "지금 입간판 본인이 넘어뜨려놓고 왜 모른 척 그냥 가시냐구요. 저거 세우세요. 뭐 하는 거예요, 다 큰 사람이." 라고 훈계를 하더군요.


 그 순간 마음 속이 억울함과 짜증으로 뒤섞여 까맣게 썩어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요양원 특유 냄새가 옷에 배는 게 싫어 추레하게 옷을 입고, 한 손에는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 입간판을 쓰러뜨린 나. 멋드러진 포마드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 남성. 그리고 그 주변을 걷던 많은 사람들. 요양원에서의 온갖 힘듦과 스트레스를 다 견디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나온 저는 일순간 입간판 쓰러뜨리고도 뻔뻔하게 지나치는 쓰레기가 돼버렸습니다.


진짜 입간판이 뭐라고,,,

 남자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제게 쏠렸습니다. 남자는 마치 '어디 한 번 너가 그걸 세우나 안 세우나 보자.' 하는 표정으로 저를 쏘아보더군요. 순간 목젖에서 수많은 말들이 솟구쳤습니다. '니가 뭘 아냐, 갔다 와서 세우려고 했다, 나 어릴 땐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도 다 주웠던 착한 사람이다, 음식물 쓰레기가 냄새나서 먼저 치우려고 했던 거다, 오늘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치매 어르신들 건강생각해서 꾹 참고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 줄 아냐, 열심히 일한 나도 병가내고 퍼자고 있는 형한테 쓴소리 한 번 못했는데, 니가 뭔데 사람들 앞에서 날 꼽주냐, 정장 입고 멋드러지게 머리 올리고 옳은 말 하면 그게 정의고 진리인 줄 아냐, 그렇게 넘어진 게 불편했으면 양손에 음식물쓰레기 끌고가는 나 생각해서 너가 세워주면 어디 덧나냐, 니는 길가다가 바람에 쓰러진 입간판 안 놓치고 맨날 세우고 다니나보다,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갈 길 가라!'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은 제 입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상황 자체가 이미 저는 나쁜 놈이었고, 그걸 세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천하의 몹쓸 놈, 정의감 넘치고 올바른 사나이의 말을 무시한 놈, 냄새 나는 음식물차나 끌고 입간판이나 쓰러뜨리는 양아치 같은 놈이 되는 거였어요. 제가 하려는 모든 말들은 이미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의 불호령 앞에서 힘없이 나풀대는 깃털이고 변명일 뿐인 거였죠. 결국 상황의 힘에 압도당해, 전 미어터지는 속상함을 욱여안고 입간판을 세웠습니다. 간판을 세우기 위해 비닐장갑을 벗던 도중 음식물이 제 옷에 튀기까지 했습니다. 더 열받는 건 그 이후 그 남자의 표정과 제스쳐였어요. 마치 '한 마디 하니까 입간판 바로 세울 별 것도 아닌 놈이 쯧쯧' 라고 생각하듯 피식 웃는 표정과, 본인의 목소리가 세상의 정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했다는 그 시크하면서도 당당한 걸음걸이. 정신없이 얽히고 꼬이던 하루의 매듭은 그렇게 한 정의감 넘치는 사나이에 의해 너무나도 간단히, 그리고 초라히 잘려나갔습니다.


 너무 억울한데 정황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어떤 말을 꺼내든 변명이 되어버리는 상황. 반박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서부터 이미 내가 추해지는 상황.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이 화가 치밀더군요. 입간판을 세우고 음식물을 버리고 요양원으로 올라가는데, 정말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정말 몸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친 억울함에 눈물을 흘린 건 그 때가 처음일 겁니다. 다른 친구들은 인스타에 유럽 여행기 찍어 올리고 있는데, 그 누구보다 착하고 정의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디 가서 군대갔다고 말도 못하는 "꿀빠는 공익"이었고, 한 남자의 돌직구에 의해 짓뭉개진 비윤리적 인간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이 글을 죽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읽을 수는 있을까요. 만약 보게 된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때의 당신, 전혀 정의롭지 않았다고. 정의로움의 맹목성에 갇혀 한 사람을 상처줬을 뿐이라고. 분명 그렇게 입 바른 소리만 하고 살다가 똑같이 본인이 그 트랩에 걸려 미치도록 억울해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이 일을 겪고 깨달았습니다. 정의로움은 절대적인 정답이 아닙니다. 그 남자가 순수히 본인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내뱉은 그 한 마디에, 나름의 정의감과 사명을 갖고 살아온 한 사람이 짓밟혀버렸습니다. 뭐 겨우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 때 제가 느꼈던 수치심과 억울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분명 저와 비슷한 경험을 겪고 크게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라 생각돼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정의로움의 '이중성'에 빠진, 본인만의 프레임에 갇힌 가짜 정의감으로 누군가를 상처입히진 않았을까, 모두가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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