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 2021년 12월
중간에 4개월을 제외한 딱 열두 달을
밤 10-12시에 사람들과 모여 매일 공부했다.
트루스 그룹의 대표이자 기획자인 윤소정 선생님이 만든 [뉴러너클럽]은 팬데믹이 한참 기승을 부리던 2020년에 시작된 공부 모임이다. 모두가 방향을 잃고 있을 때 다음 스텝으로 퀀텀점프하기 위한 도움닫기의 시간을 보내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이 모임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던 건 나의 삶에 일어난 커다란 행운이었다.
공부를 리딩 하는 선생님은 자신이 성장한 과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누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을 키워내는데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인간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먼저 가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의사 결정하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이는 선생님이 자신의 스승들로부터 배운 과정이기도 했다.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아낌없이 나누는 선생님 덕분에 더더욱 공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늘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힘은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바라봤던 나였다. 그런 내가 매일 밤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다니. 최근에는 노자의 도덕경,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같은 어려운 책이 읽히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나 자신을 최적화해나가는 과정이었다. 분명 지식을 채우는 모임이었지만 오히려 마음에 덕지덕지 붙은 것들을 비우는 경험에 가까웠다. 나는 공부를 통해 그간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했고 부끄러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간의 굳어있던 생각을 하나하나 깨어 나갈 수 있었다. 단연코 그 어떤 심리치료보다 더 도움이 되었던 과정이었다.
그런 나 자신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의 불안함이 함께했다. 과연 공부를 리딩 해주시는 선생님이 없다면 나 혼자 이어갈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어느 정도는 돈으로 의지력을 사고 있는 것 아닐까? 이 좋은 습관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히 함께 공부를 해나가고 싶어도 이 비밀스러운 공부 모임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50명 정원인 그룹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새로 들어오려는 경쟁은 치열해져서 매번 1초 컷으로 마감됐다. 언제까지고 혜택을 독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립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그리고 때마침 선생님께서도 새해를 기점으로 자립을 제안하셨다.
세상에는 정보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자기 자신을 활자 중독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정보를 욱여넣는 습관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과 블로그가 막 떠오르던 시절 나는 궁금한 키워드를 검색한 뒤 관련된 모든 포스팅을 완독 하곤 했다. 시즌 방식의 미국 드라마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세계는 또 어떻고. 내 영어회화 실력의 팔 할은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똥을 싸면서도 드라마를 봤던 빈지 워칭(Binge watching) 덕분이었다. 그런 내가 공부에 꽂혔다는 건 반가운 신호인 한편 자칫하면 목적을 잃고 공부한다는 행위 자체에 도취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문득 공부를 꽤 오래 이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부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의 마음이 전달이라도 된 듯 그날 밤 수업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이 혹시 공부한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공부한 것을 활용해 어떻게 하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즉 어떻게 하면 돈이 될지 고민이라고 물었다.
역시나 선생님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면 돈을 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공부한 것을 쓴다는 것은 공부한 내용이 사람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에서 얼마나 더 확장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공부한 것을 써먹고 싶다고 말하면서 실제 쓰는 일은 게을리하고 있었다. 마치 언어유희같은 이 말은 결국 아웃풋, 즉 결과물에 대비해 부족한 행동력을 의미했다.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서 온몸으로 퍼져 행동으로 나타난다.
모든 것이 구글로 검색 가능한 정보의 시대다. 손가락 몇 번 움직여서 새로운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입으로 지식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찐을 찾는 이유는 찐들은 정보를 습득한 뒤 진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정보의 진정한 가치는 한 사람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말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배어 나오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발현된다. 그것이 진정한 내재화이다. 스스로 지식의 살아있는 화신(embodiment)이 되는 과정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인플루언서로 마주하는 지식 노동자들은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 축적의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의 경우 네 치에 불과하니, 어찌 일곱 자가 되는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 순자
매일 2시간씩 1년을 공부했다. 하지만 지식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실제로 내가 한 번 더 사색한 뒤 글로 남기고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간 것들 뿐이다. 대학교육을 포함한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이 내게 남지 않은 이유는 진짜 내 것으로 만들어보는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다행이다. 왜냐하면 공부를 통해 스스로를 최적화해가는 습관을 최소 10년은 이어가 볼 생각이니까.
기왕 태어난 이 세상에서 이롭게 쓰이고 싶다는 마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쓰이고 싶으면 써야지 어쩌겠는가. 지식을 내재화하는 삶을 살겠노라 출사표를 던지는 나만의 방식은 결국 우직하게 '쓰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것이 매일 2시간씩 1년을 공부하며 어렵게 얻어낸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