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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니 Aug 30. 2022

울타리 밖 너머 새장으로

ep.2 울타리 밖 너머 새장으로



기세 좋게 집을 떠났던 의지와는 달 고등학교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치유하지 못한채 지나간 트라우마가 무의식 깊은 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은 한 살이었던  손으로 일단락이 됐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나는 내가  일을 찾았다. 손때 묻은 하얀색 무선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지금도 몇번이고 다시 돌아가 리플레이   있는 장면이다.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선 나는 신호가 끊어지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구급차를 불렀다.



스스로 공권력의 도움을 요청했을만큼 내게는 분명 기질적으로 타고난 강인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경험한 충격은 감정적 조절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먼저 눈물샘이 고장났다. 나의 감정은 외부적인 자극에 지나칠 정도로 요동쳤다. 가뜩이나 감수성이 풍부했던 기질과 더해져 조그마한 부정적 감정이라도 촉발되면 눈물이 터져나왔다. 감정이라는 강물을 조절하고 막아주는 둑이 무너져 내린거다.



감정 조절 능력에 문제가 생기자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시시때때로 격정에 치닫는 감정은 무의식을 헤짚어 놓았고 일렁이는 충동 앞에서 이성은 작동하지 못했다. 여러 문제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때는 모둠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가위를 던져 상처를 냈다. 문방구에서 물건을 하나  훔치기도 했다.  커서는 카리스마로 무장한 나르시시즘으로 스스로를 감싸고 친구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나마  밖에서는 쾌활함과 명석함으로 나를 포장하고 폭발적인 감정과 공격성을 컨트롤   있었다. 문제는 통제가 느슨해지는  안에서였다. 나는 집에서 폭군과 같았다.



스스로도 그 모든 행동들이 문제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매순간 나의 이성적 두뇌는 경보를 울려댔다. 이런 행동의 끝이 좋을리가 없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착실히 습득한 도덕 교과서의 내용이 내면에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수치심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기 비난이 끊일 새가 없었다. 충동적 행동의 발현과 자기 학대의 굴레가 끊임없이 반복됐다.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이런 증상이 청소년 가면 우울증의 일종이라는걸 알게 된 건 서른이 넘어서였다. 타고난 기질이 긍정적이고 외향적인 탓에 평생 우울증을 경험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롤러코스터 같던 감정 기복이 사실은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 질환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충족되지 않았던 정서적 안정과 억눌린 감정들이 들끓었던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 속에서 나는 실존적인 위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어린 내게 세상은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반에서 학급 반장을 도맡아 하고 공부 잘하는 밝은 학생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어른은 없었다. 나는 내면에서 벌어지는 도덕성과 충동성간의 투쟁을 홀로 이어가야만 했다. 마침내 고등학교 진학에 성공해 집을 탈출하게 되자 외적인 통제의 끈이 더욱 느슨해졌다. 이제 열차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신호를 무시하고 선로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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