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첫번째 여행
데이비드 브룩스의 <소셜 애니멀>은 가상의 두 남녀의 인생을 따라가며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사랑과 성공 그리고 성격의 발달 과정을 다룹니다. 심리학, 사회과학, 신경과학 등 다양한 이론을 접하다보니 나라는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반추해보고픈 욕구가 샘솟았습니다.
저자가 책을 통해 던지는 질문, '나의 가장 본질적인 재능을 개발하면서 중요한 일에 시간을 썼는가?'에 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스스로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self-empowerment)는 한 뇌과학자의 말에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나온 삶의 여정과 깨달음을 글로 써나가보고자 합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지루한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처절하게 솔직한 날것의 이야기입니다. 드러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리플레이되는 과거의 가지를 끊어내고 싶은 욕망이 가득합니다. 흘려보낸 자리에서 자유로이 앞으로 나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답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 진행중입니다. 한 인간이 답을 찾아온 과정이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당신의 여정에 힌트가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브런치 exclusive.
요즘 읽는 책 <소셜 애니멀>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한 명은 해럴드, 다른 한 명은 에리카.
저자는 두 가상 인물의 성장 과정을 다루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다.
첫번째 캐릭터인 해럴드가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큰 굴곡 없이 자라왔다면 에리카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에리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따금씩 부재했고 어머니의 조울증 곡선에 따라 중산층과 빈곤층을 오가며 자라났다. 앞서 나온 해럴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중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미래를 그려봤다면, 에리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곧 에리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짚어본다. 수많은 교집합 사이에 단연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꼽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세계관일 것이다. 그녀와 내게 이 세상은 생존을 위해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장이었다. 그러한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 이유는 차차 책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세계를 형성해야 할 부모 역할의 부재가 있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정상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많은 정상 가정이 으레 그러하듯 비정상적인 면모 한 둘 쯤을 갖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딱히 불행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나보다 더 비참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발에 채이도록 많다. 그러나 에리카라는 가상 인물의 삶처럼 내 어린 시절을 관통한 것은 아버지의 부재였다. 자영업의 덫에 걸려 시간과 돈을 교환했던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성실히 가정을 지키는 헌신하는 아버지의 전형이었다. 단지 가정의 울타리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에 집중하느라 그의 시선이 가정을 향할 시간이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을 뿐. 평범한 그러나 위대한 이 시대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의 정서적 부재는 역으로 그를 지나치게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최선을 다해 곁을 지키느라 불화를 쌓아갔던 엄마보다는 곁에 있지도 않았던 아빠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생각이 더 컸을 정도니까.
한편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강력하게 진동하는 영혼의 울림이 있었다. 그 메시지는 명료했다. '지금 이 곳을 벗어나라.' 지도 밖을 행군하라는 한비야의 책은 제목만으로도 나의 영혼을 강하게 떨리게 했다. 내 삶의 키워드는 하나였다. 나만의 삶의 지도를 만들라. 그만큼 나는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왔던 부모님이 내게 제안한 것들은 모두 고리타분했다.
그들은 자녀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그린 꿈은 2년제 세무학과를 졸업해 평생 일할 수 있는 기술을 갖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조금 더 큰 야망을 투사했지만 그녀의 바람도 경험의 크기를 벗어나진 못했다. 교육자인 할아버지를 보고 자란 어머니는 서른이 넘은 딸이 여전히 교사가 될 거란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 안에는 들끓는 욕망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나의 욕망을 촉발한 계기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목격한 어느 새벽의 일이었다. 뿌연 새벽녘 방문을 열고 나와 본 거실은 아수라장.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진 꽁치 통조림의 비릿함이 코를 찌를 쯤 나의 시선은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닿았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실망감이 한데 엮여 세상을 향한 애증으로 발전했다. 단 한 번의 실수였다. 변할 것도 없었다. 여전히 엄마는 통제적이었고 아빠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지루한 일상에 지긋지긋함이 더해졌다. 주어진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내면의 불꽃에 기름이 부어졌다.
처음엔 돈을 벌려고 해봤다. 하지만 고작 10대 초반 여자아이의 시선으로도 기술이나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노동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출도 마찬가지였다. VJ 특공대에 나와 오토바이를 타는 가출 청소년의 삶은 어린 나의 눈에도 나락으로 가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부모라는 견고한 울타리가 있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은 극한의 엇나감을 딛고 일어난다는 영웅적 서사까지 갖추진 못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탈출 방법은 단 하나였다. 공부.
책에서 에리카도 그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빈민가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했다. 그러나 첫번째 기회가 찾아왔을때 친척의 집에 얹혀 사는 신세 때문에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두번째 기회가 찾아왔고 그녀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새로 생기는 학교의 이사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에리카는 다짜고짜 찾아가 입학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 순간 그녀가 어른들 앞에서 보였을 그 눈빛과 분위기를 나는 안다.
내가 그런 소녀였기 때문이지. 고등학교 입학 면접에서 내가 보였을 눈빛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새벽까지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시에서 모집하는 영재 선발 면접에서 초등생이 보인 갈망의 에너지였을 것이다. 결국 에리카도 나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집을 나와 첫번째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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