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나길 온 세상을 제 발 밑에 두고 사는 성향이 있는것 같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설레는 사람. 여전히 내게는 태초부터 가지고 온 흐리멍텅한 현실감각이 남아있다. 제 삶에 한계라곤 없는듯 머나먼 목표를 현실로 오인하곤 하는. 10대 때의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망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굴곤 했다.
오죽하면 내신 성적이 평균 7~8등급을 오갔는데도 수능 직전까지 내가 연고대에 갈 줄 알았겠는가. 달성하려는 목표는 높은데 비해 공부는 게을리했으니 당연히 성적이 나올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나는 수능 날까지도 여유를 연기했다. 어차피 내년에 다시 보면 되니까 오늘은 연습 게임이라고. 정신 승리도 이런 정신 승리가 없었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잘 걸리는 덫이 있다. 목표만 크고 실행은 않는 사람들의 무덤. 바로, 무기력증이었다. 분명 재수를 결심한 건 9월 모의고사 즈음이었는데 1월이 다 됐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즈음의 나는 실제로 가상의 세계로 도피했다.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며 게임과 미드에 빠져들었다. 그저 공부만, 아니 사실 바닥을 친 내 인생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였던 것 같다.
정시 일정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지원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보다못한 엄마가 신용카드를 던지며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까지 어디든 지원 안하면 알아서 하라고. 나는 다트를 던지는 심정으로 남아있는 정시(다)군에 지원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에 지원한다는 심정이었다.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내가 재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사실은 다시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는 걸 왜 서른이 넘은 지금에야 바로 볼 수 있는걸까. 어쨌든 밀려가듯 지원한 학교에서 합격 통보가 왔고, 2월 즈음에는 황량한 신도시에 지어져 매서운 바닷바람이 살벌하게 부는 캠퍼스에 서게 됐다.
그건 스무살의 내게 주어진 두번째 기회였다. 나는 또 다시 선택지를 마주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실전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내 인생을 걸고 시작된 진검승부. 이번에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인생 꽃피워보기도 전에 망할 수 있겠다는 등줄기 서늘하게 현실이 스며들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내 삶의 설계도를 찾아나서는 여정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