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비>로 보는 현대사회 여성의 성장 여정
영화 <바비>를 보며 저는 엄마가 많이 떠올랐어요.
나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세대 앞서 태어나 삶을 통해 성장해온 한 여성을 말이죠. 그녀는 어떤 어려움을 이겨냈고,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까요. 분명 시대는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나눴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성장의 여정이라는 저만의 관점으로 영화 바비에서 인상 깊었던 포인트를 짚어볼게요. 제게 와닿았던 키워드 세 가지로 정리해봤어요. 영화 내용을 다루다보니 스포일러 주의!
<목차>
Perfection 완벽을 추구하는 여성
Permission 허락을 구하는 여성
Option 선택권을 구해온 여정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바비가 완벽한 존재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두통과 입냄새로 시작된 아침….아치가 무너진 평평한 발과 셀룰라이트까지! 그 모습이 리얼 월드, 꼭 현실 세계의 여성들과 같아 보인다면 정답!
게다가 자꾸만 죽음에 대한 생각, 왠지 울적한 느낌 등... 바비는 자신의 완벽했던 삶에 찾아온 균열에 당황합니다. 결국 다시 완벽함을 되찾기 위해 현실 세계로의 모험을 선택하게 돼요.
△ 영화 <바비>의 한 장면ㅋㅋ 빨간약 파란약 뭐 먹을래?
그러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바비를 기다리는건 완벽함은 사라지고 현실 세계의 모순이 반영된 바비 월드 뿐이었죠. 유능했던 대통령 바비는 갑자기 켄의 사기를 북돋는 치어리더가 되고, 변호사 바비는 메이드가 되어 맥주를 나릅니다.
바비월드가 가부장제에 잠식당해가는 동안 바비에게도 개인적인 변화가 생기는데요. 직업적 타이틀이 있는 다른 바비들과 달리, 마고 로비가 연기한 '전형적인 바비'는 그마저의 능력도 부여되지 않았다는걸 알게 되는 겁니다. 바비는 자신이 아름답지도 않고, 능력도 없다는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바비가 마주한 실존적인 좌절을 잘 보여준 것이 극중 아메리카 페레라의 독백 연기입니다. 그의 대사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는 일인지 알 수 있었죠.
변함없이 완벽하던 세상에 찾아온 극적인 변화에 너무나 좌절하고 정신 못차리는(ㅎㅎ) 바비에 비해, 현실 세계에서 온 엄마와 딸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 대조됩니다. 그만큼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익숙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어요.
도무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현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지를 현실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했어요.
△ 바비 창립자 루스 핸들러의 젊은 시절
흥미로웠던 또 다른 포인트는 바비와 마텔 사의 창립자 유령(?) 루스간의 대화였습니다. 완벽해보이는 세상에 남기보다 불완전하더라도 변화를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자 소망한 바비. 바비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 이를 만나자 자연스럽게 '허락을 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바비에게 루스는 얘기하죠.
네게 필요한 건 허락이 아니란다.
그저 느껴보렴.
그러자 바비는 눈을 감고 숨을 쉬어봅니다. 마치 피노키오가 푸른요정의 마법으로 인간이 되는 순간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을까요? 뾰로롱하는(?) 효과가 가득했던 앞의 장면들과 달리 그녀가 인간이 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웠습니다.
바비가 눈을 감자 수많은 삶이 스쳐지나갑니다. 기쁨도 좌절도 행복도 슬픔도 그저 자연스럽게 경험하며 흘러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 어떤 삶도, 감정도 허락을 받아야만 주어지는게 아니었어요.
저는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봤어요. 정말이지 수많은 여성들이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며 살고 있거든요.
내가 살고픈 삶이 있어도 부모님의 허락을, 직장에서 상사가 기회를 주기를, 원하는게 있어도 남편이나 남자친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허락을 구해요.
요즘 세상에 그런 여성들이 어디 있냐구요? 글쎄요. 여러분은 메뉴판 앞에서 다른 사람의 리뷰를 검색해보지 않고 그 순간 원하는 걸 택하는 사람인가요? 물건을 살 때도 리뷰 페이지, 친구들, 커뮤니티에 묻지 않고 구입할 수 있나요?
여성들은 고유의 능력인 '직관'에서 너무나 멀어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순간에 느끼고 전달하는 방법을 잃어가고 있어요. 사실 진짜 내 삶은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부터 펼쳐지는데도 불구하고요.
영화 속 루스의 존재는 바비에게는 창조주와 같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신과 같은 존재이니 허락을 구하는 것도 응당 당연해보일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루스의 입을 빌어 강조한 것은 결국 '자유 의지'라고 생각해요.
신은 개입하지 않아요. 모든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할 뿐입니다. 영화도 같은 맥락에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평생 허락을 구하며 한발짝도 나서지 못하는 것도, 결단을 내려 앞으로 나가는 것도 모두 당신의 자유이니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리겠냐고요.
영화를 통틀어 전율이 느껴졌던 장면이 있었어요.
We mothers stand still so our daughters can look back to see how far they have come.
엄마들은 딸들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돌아볼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 영화 <바비>
개인적으로 강펀치를 맞은듯한 대사였습니다.
마텔을 설립한 루스는 딸 바버라와 아들 켄의 이름을 따서 인형을 만듭니다. 소녀들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됐던 바비 인형은 시간이 지나 전형적인 미적 기준을 고착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죠. 그런 비판마저도 겸허히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루스가 바라던대로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겁니다.
영화의 첫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사전 공개돼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패러디 영상입니다. 바비 인형이 등장하기 이전, 여자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은 아기 인형 뿐이었습니다. 인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곤 '엄마' 밖에 없었죠. 바비 인형은 그랬던 세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어요. 바로, 선택권이라는 바람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딸들의 책무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보다 행복해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 삶을 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대의 헌신이 있었을지 한번쯤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하지만 완벽함이라는 허상에 집착하다가, 혹은 누군가가 구원해주리라는 허락을 기다리다가 눈 앞의 선택지가 얼마나 귀한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지를 알면 마음이 아파요.
어떤 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잊곤 합니다. 특히 저처럼 신분상승의 욕망을 가득 안고 아비투스의 계단을 올라본 여성들이라면, 새로 만나게 된 세상과 내가 자라온 집구석 간의 대조되는 환경에 넌더리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엄마들이 그 자리에 머물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나'였을 것이거든요. 내 앞에 수많은 선택지를 물려주기 위해서 당신의 삶을 바쳤을테니 말이죠. 그런 엄마가 희생한 것 같아 부담스럽고, 때론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딸에게 얼마나 멀리 갔는지 알려주기 위함이라니'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다 본 뒤 제게는 강렬한 마지막 질문 하나가 남았습니다.
누군가가 생명을 바쳐 물려준
선택지를 어떻게 쓸건데?
저는 정말이지 더 멀리 나아가고 싶어요. 언젠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엄마 때문에 발목 잡혔다가 아니라 엄마 덕분에 이 삶에서 내 몫을 멋지게 해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더더욱 의식의 성장을 위해, 깨어있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동력이 되는 듯 합니다.
그러니 우리 "엄마보다 행복하게 살아요". 엄마의 엄마가, 그 엄마의 엄마가 꿈꿔왔던 세상을 만들어봐요. 저는 그렇게 살아보려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