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로기완’이 3월 1일 개봉됐습니다. 같은 날 아담 샌들러가 주연으로 출연한 멋진 SF 물 우주인 때문에 아마 글로벌 1위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국내 1위는 보증 수표죠.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이 유명한데 제가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장르는 로맨스이며 거기에 사회성을 많이 가미한 작품입니다. 사회파 로맨스가 되겠지요.
탈북민 혹은 북한이탈주민 이야기는 금기는 아지지만 국내 영화계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소재입니다. 탈북자든 조선족이든 한국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습들은 범죄 마약 등에 연루된 집단으로 아주 부정적으로 그려지죠. 많은 국민들이 빈부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는 이 핼조선에 왜 오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물론 그들에게 그러면 북한에서 살아 보는 건 어떤가라고 물어보면 100%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북한이 사회주의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일단은 인정해 주기로 하죠.)로 체제는 다르지만 벨기에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된 탈북자 노기완과 마리의 사랑 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유된 상처가 있지요.
어찌 보면 영화는 뻔한 클리세로 처음부터 끝까지 점철돼 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영화이기는 합니다. 장소가 바뀌면 영화 분위기도 달라져야 하는데, 전반적으로 관객이 예상하는 흐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북이라는 체체를 벗어나 대한민국이든 제3국이든 타국을 택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유주의에 기초해 자본주의를 설립하는 헬조선의 MZ 세대들이 추구하는 것 역시 자유입니다. 그 자유 앞에 경제적이란 조건을 붙이죠.
탈북민들의 자유와 남조선의 경제적 자유는 같은 걸까요? 다른 걸까요? 물론 약간 다릅니다. 노기완이 추구한 자유는 자유를 포함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받고자 즉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유라면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국내 MZ세대의 경제적 자유는 돈이 없음으로 걷게 되는 여러 고통. 그중에서 모멸감은 가장 크죠, 으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자유입니다.
노기완과 그의 하나뿐이 어머니 그리고 외삼촌 역시 중국으로 탈북한 뒤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죠. 노기완의 벨기에행 비행기 표와 약간의 여비는 어머니 김성령의 사망 후 의대에 카데바용 시신으로 시체를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탈북자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조선족으로 몰려 중국으로 북송(즉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노기완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도축장에서 방금 나온 소와 돼지를 고기로 만드는 그런 일을 하면서 먹고살죠.
마리는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사격 선수였다 안락사를 택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허용한 아버지를 증오하며 자립하려다 생긴 빚 때문에 목숨을 건 사격 대회에서 살아남으려고 그와 동시에 죽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감독이나 원작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노기완과 마리의 대립된 현실이 북한 인민들과 남한 국민들의 차이를 드러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탈북민들이 보기에는 마리 같은 경우는 정말 배가 불러 호강에 겨워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 파멸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흥분하지 않고 인간미를 끝까지 유지하는 캐릭터 송준기는 마리가 스스로 선택한 가지 파멸을 이해하며 공감해합니다. 어찌 보면 류기완은 인간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 경제적 자유를 못 누리더라도 인간의 길을 버리지는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입니다.
기존에 작품들이 조선족이나 탈북자들을 돈에 미쳐 있거나 약에 미쳐 있거나 돈을 위해서라면 금수의 길을 얼마든지 스스로 걸어가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에 비해 이 작품은 적어도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탈북자 이야기를 그린다면 이런 템포로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작부터 피가 철철 흐르는, 무조건 레어로 구운 스테이크를 원하는 넷플릭스 유저들에게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