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악단에서 녹음한 몇 가지 음악을 들었을 때 난 성에 차지 않았다. 음악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곳에서 몸소 체험한 것이다.
무기력함마저 받아들여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그렇기에 그 생각은 단념으로 이르는 중이었음을.
TV에서 노랫소리가 들렸으며, 어느 날 그 음악을 들으며 그곳 앞에 한참을 머무르고야 만다. 노래는 이미 끝이 났음에도 아직 그곳에 시선을 둔 채 떼어내지 못한다. 그 곡은 이 땅으로 온 소련군을 보며 그들이 부르기 시작한 노래였다.
한 구절의 시를 읊는 우렁찬 목소리와 같았음을. 그건 이 나라에서 불리는 애국가였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명절 경축공연이 있던 때였다. 난 텔레비전 속 지도자 동지의 누이를 봤다. 어렴풋이 들은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꼭 모조품을 보는 듯했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연출된 것처럼 보였음에도. 거짓말처럼 그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또 한 번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신세가 됐으며, 반란을 꿈꾸는 자를 마음속 깊은 곳에 둔, 그 여자는 아직 그 군인을 떠나보내지 못한 처지 같았기에.
그 집은 멀고도 또 멀었으며, 내 두 눈은 다시 가려졌고 머리 주위의 핏줄들은 팽팽해졌다. 그 끈은 다시 머리 피부에 자국을 남긴다.
자동차 바퀴는 길가 땅에 자란 높은 풀들을 밟는 듯했고. 아무도 오지 못할 곳 길 끝에 초라한 모습으로 그 여자는. 그 집은 아름다웠음에도 다가갈 수 없을 듯했다.
백두혈통의 유일한 딸은 그 깊은 산골짜기에 처박힌 듯 머물렀다.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날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 다시 고개 돌린다. 내 오른편에 낯선 자의 모습이 있었다.
"누구죠?"
"감독님을 찾는 분이 있습니다."
라 부장이 아닌 남자가 내게 말했다.
"라 부장은요?"
내 얼굴 위로 다른 자의 얼굴이 다른 그림자를드리움을 알았다.
"당에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혹시 그가 날 탈출구로 이끌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음에도. 이 국가 어딘가에 구멍이 있어 빠져 나갈 길을 그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얼굴을 바라보는 그 자의 얼굴 표정은.
지도자 동지의 누이는 술을 입에대지 않았다. 내가 말 할 수 있는 사실은 그것뿐임을. 그 여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말이다. 담배를 앉은 자리에서 여섯 일곱 가치는 피워 대 머리가 어지러웠을 뿐. 담배 연기에 가려 어떤 이의 눈엔 그 잔이 술잔처럼 보였던 건 아닌지.
자동차 바퀴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 문이 열리고 눈을 떴을 때 그 여자를 본다. 지붕이 높은 큰 집 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걸 봤다. 문을 열어둔 채 곧 자기 몸을 감춘다.
그 작은 문 앞으로 다가가는 걸음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땐 무엇이 꽃이고 풀이며 혹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걸 밟는다.
큰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그 여자가 앉았다.
“미안해요.”
그 여자가 내게 한 인사는 그랬다.
“이렇게 갑작스레 모셔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여자와 난 이상하리만치 멀리 앉아 대화를 나눴고, 그런 구도 배치를 한 게 그 자신인가 스스로 묻고 궁금해할 뿐이었다.
집 안 모습들을 두 눈으로 기억해둔다.
"전 그 노래가 좋더군요. 헤이즈의 노래 말이에요."
그 여자 목소리를 들은 몇 되지 않는 자. 이 세상 모든 일을 혼자 꾸민 것처럼 믿는 영화감독.
서울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그 노래가 그 여자에게는.
"남쪽 노래들을 많이 듣습니다."
"동생은 영화를 좋아하죠.”
그 목소리를 녹음한다.
“난 영화를 보고 나면 음악만 기억해요. 오직 이 귀뿐인 사람이죠."
흐트러진 머리를 한쪽으로 쓴 그여자는 얼굴을 틀어 그 모양을 보여줬고.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더해질 것이다. 자기 귀를 보이던 그 옆모습을 사진 찍으며.
끝내 그걸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탈출을 꿈꿉니까?"
그보다 더 큰 꿈을 꿀 수 없어 난 아무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내 동생을 가로막고 서면 당신 눈엔 우리가 보이지 않아요."
마치 들은 적 없는 듯, 오직 그 집 안에 머물렀다는 믿음만을 잃지 않은 채로.
그토록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난 애국가를 듣고, 그건 가슴에 담을 수 없는 곡이었음에도 흔들리며 무너질 듯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그 뜨거움은 계속 뭔가를 이루어내고 쏟아내려 한다. 가슴속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두 눈을 향해 알 수 없는 물질을 실어 날랐다.
이 세상을 살며 가지는 소속감을 달리 표현할 길 없다. 소리 내 부를 수 없는 그 노랫말이 내 몸 안을 가득 채운다. 모든 게 처음이 좋다. 처음 몇 구절, 처음 시작하는 순간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건 변하고 추해지니까. 몸을 가리듯 본질이 감춰지는 곳은 짜깁기된 이야기 속임을.
새로운 옷을 입어야만 할 듯 엄숙해졌고, 크게 흔들리고 쓰러진 뒤 아침이 오면 눈가의 물들도 모두 말라붙고 말 테다. 내 마음속 애국을 찾는 일. 모든 사람이 태어나 외워야만 하는 노래였을지도.
어느 날은 산과 산을 넘어, 강을 건너고 바다가 있는 곳으로까지 전해질 소리들을. 우린 과연 지난 날을 기억하는가.
언젠가 마주하게 될 미래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난 이제 두 개의 애국가를 아는 가슴이 됐다.
“내 동생이 만약”
떠나는 내 등에 그 여자가 던진 물음이었다.
“내 동생이 군대를 움직인다면, 그렇다면 정 감독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돌아오는 길 창문 밖을 본다. 그곳을 떠올렸다. 문득 서울이 궁금했다. 그들은 여전히 꿈꾸는지.
"뻐꾸기를 잊지 말라 합니다."
헤이즈는 아직 노래하는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 그늘처럼. 그럼에도 그 여자가 내 주위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안 건 지나가는 한 대의 자동차를 통해서였다.
그를 수행하던 자가 차에 오르려던 내게 다가와 한 말이었다.
‘뻐꾸기를 잊지 마시라요.’
장각산 호텔로 향하던 길 난 그 자동차를 봤다. 뻐꾸기 한 대가 우리 옆을 지나는 걸 본다. 장은호가 날 거기로 불렀고, 어느 날 그 여배우가 내게 다가왔으며 더 이상 달아날 수도 도망칠 곳도 없음을 깨닫는다.
북녘의 모든 눈들이 그 모습에 울고 웃을. 그 여배우를 본 건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즈음 난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곳이 여행자들이 들락거리는 호텔일지라도.
호텔 문 앞에 검은 차가 끼익 멈추며 나타나고, 어떤 남자들이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와 그곳을 소란스럽게 만든 뒤 날 끌고 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