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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Feb 28. 2024

이게 제가 맡은 일입니다.

청와대 방문의 씁쓸한 기억

 생각 없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들을 넘겨 보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1월 초에 아내, 아이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갔었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예정된 일정에 따라 청와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단정한 겉모습과 잘 꾸며진 실내를 구경하던 중 아이가 대통령과 가족들이 잠을 자는 곳은 없냐고 묻기에 우산을 펴 들고 관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빗방울은 점점 거세지고 들고 간 우산은 너무 작아서 옷이 젖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더군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출구를 향해 가던 중 안내를 담당하는 분께서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알려주더라고요. 미끄럽지 않은 길은 없냐고 물어보니 어느 길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기에 저희는 녹지원이라는 잔디밭 방향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 경로가 가장 짧아 보였거든요.


 그렇게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나머지 손은 아이가 미끄러지지 않게 꼭 잡은 채 조심조심 걸어가는데 바닥이 살짝 얼어서 거의 빙판 수준이더군요. 앞에 계신 어르신들도 휘청휘청 제대로 걷지 못하셨고. 중년의 여성분은 도저히 혼자서는 보행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벗어나 잔디 쪽으로 가시려고 하니 관리자로 보이는 분이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밖으로 나오세요."


 그 말을 듣고 그 여성분은 다시 인도 쪽으로 나오셨고, 누가 봐도 곧 넘어질 것만 같은 불안한 몸짓으로 빙판길을 다시 걷더군요. 결국 보다 못한 관리자가 옆으로 가서 부축을 해 주려 하는데 제가 보기엔 오히려 둘이 한꺼번에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분들은 다들 위험 구간을 잘 벗어났지만 저와 아이 그리고 아내는 도저히 못 가겠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잔디밭으로 들어가서 걷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여지없이 다시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밖으로 나오세요. 들어가지 마시라니까요."


 저는 아내와 아이에게 그냥 계속 가라고 재촉했습니다. 그 후로도 그분은 거듭 저희에게 나오라고 요구하셨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넘어졌다가는 다치거나 옷을 다 버릴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렇게 무사히 덜 미끄러운 곳으로 빠져나왔고 그분은 못마땅한 얼굴로 저희를 쳐다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디 했습니다.


"이렇게 미끄러운데 자꾸 잔디밭에서 나오라고만 하시면 어쩝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그리고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이었겠죠. 상대방에게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이게 제가 맡은 일입니다. 전 제 일을 할 뿐이고요."


 아내와 아이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저를 가볍게 끌고 가려하기에 마지막 말을 던졌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바닥에 뭘 깔던지 해주셔야죠. 맡은 일이 잔디 보호라고 해서 보행자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해도 됩니까? 잔디가 사람보다 중요합니까? "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야기를 나눠봤자 서로 감정이 더 상할 듯하여 모른 척 걸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분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상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대책을 마련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요? 청와대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겠으나 매트나 하다못해 박스라도 좀 깔아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다시 밀려옵니다.


 만약 누군가가 넘어져서 다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랬다면 적절한 조치나 대책이 세워졌을까요? 그동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습은 많이 봐왔으니 이제는 그러려니 적응하는 편이 빠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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