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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r 14. 2024

끼적끼적

[눈 물 꽃]


겨우내 쌓였던 눈꽃이

눈물이 되면

메말랐던 땅 촉촉해지고

새싹은 돋을 준비를 하겠지

꽃눈을 꿈꾸며.




[평평(評)]


단칸방

24평

29평

33평

39평


평수가 커지고

방이 많아지며

가족 사이의 거리도 멀어진다.


고작 얼마나 될까 싶지만

지지고 볶아대던 작은 집 보다

대화가 뜸해진 지금

서늘한 불평만 늘어간다.




[바람]


바람이 불기 전에는 몰랐다.


나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나를

지지하는 뿌리가 있다는 것


내가

쥐고 있는 열매가 너무 무겁다는 것




[짝꿍이라며]


나 너무 외로워. 정말 항상 외롭다고.


너 지금 누구랑 있니?


너하고. 왜?


쳇! 이젠 갑자기 내가 외로워지네.




[논리지, 마!]


내 맘이지!


그래 너 마음인 건 알겠는데, 왜 그랬냐니까?


그냥 내 마음이었는데?


아니 이유, 이유를 말해보라고!


야! 이유가 있으면 그게 마음이야? 논리지.




[성격]


독창적

독보적

독자적

독립적

독점적인


시간의 성격




[타임머신 1]


과거의 내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힌다.


후회라는 이름으로.




[타임머신 2]


미래의 내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나를 다그친다.


기대라는 이름으로.




[타임머신 3]


현재의 내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 가


나를 기만한다.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빚의 대물림]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빚을 지게 된다.

너무 어려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그때부터 마이너스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중에 본인은 원한 적 없다고 외쳐봐야 아무 소용없다. 귀담아 들어줄 사람이 거의 없을뿐더러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나를 한낱 정신 나간 놈 취급할 테니까.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면 무언가가 필요하다. 

입고 먹을 것부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이 결국은 돈과 연관되어 있다. 아무리 건강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갓난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다. 엄마와 아빠의 손길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요즘은 어째 돈의 온정이 더 따뜻하고 절실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그렇게 개체 혹은 집단의 본성이 드러나기도 전에 지체 없이 길들여진다.

가진 것에 익숙해지고 없는 것을 동경한다. 동물과 인간을 굳이 비교할 마음은 없지만 인간이 그들과 달리 일찍 독립을 하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면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간이 그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녹아드는 과정에서 은연중(혹은 대놓고)에 자연이 가진 원초적인 힘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진화와 적응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신체와 정신이 가진 능력을 대체할 무언가를 개발하거나 역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방법에 집중해 왔다. 마치 인류가 강해지고 빨라지고 현명해진다고 믿겠지만 오히려 더 약해지고 느려지고 우둔해지는 중이다. 세상에 나가기까지 배워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의 시스템이 마치 미로처럼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까다로워질수록 인간의 홀로서기는 점차 뒤로 밀려난다. 성체가 없으니 후대를 기대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자명하다.


자동차와 컴퓨터,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다면 과연 혼자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어른, 아이, 남녀 할 것 없이 문명의 이기를 누린다고 여기겠지만 실상은 그것들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중독되어 있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그 안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에 목을 매고 거기에 의지하려 한다. 스스로 인질이 되길 자처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 분업화는 전문성 대신 편협한 일상을 선물하고 있다.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헤드램프를 조립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 부품에 대한 전문성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조립에 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 역시도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넓고 크게 삶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그저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강요받으며 숨겨진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껍질을 손수 벗겨내야 한다.


생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덧붙이자면, 우리는 소비를 목적으로 한 생산 속에 살고 있다. 팔릴 것이라는 기대로 모든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00퍼센트의 효율을 가진 시스템은 없다. 100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110이나 150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 말은 결국 결과물 대비 과한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00개를 생산해서 100개가 전부 팔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결국 잉여가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건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된다. 비단 팔리지 않은 물건뿐 아니라 이미 팔린 물건일지라도 수명이 다하거나 다양한 이유로 폐기가 된다. 그 또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합친 것만큼 또 빚이 늘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할까? 

우선 교육과 학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무한 경쟁'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보편화된 성공'의 실체를 제대로 밝혀내야 한다. 성공은 몇 가지 지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재능을 적절하게 발휘하고 그에 따른 보상과 보람에 대해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갖춰져야 하는데 그 시작이 제대로 된 교육인 것이다. 교육이 어긋난 길로 접어들면 그 끝에는 삐뚤어진 신념이 무럭무럭 자라고 결국 진실을 보는 힘을 잃어버린다. 물론 신념 자체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인류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착각은 언제쯤 깨질까? 왜 꼭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 있는 그대로의 흙길이 아니라 반드시 시커먼 아스팔트여야 하는지 너무 늦지 않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 이상 대대손손 빚만 갚아가면 사는 삶을 후대에게 물려줄 마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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