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호 Mar 20. 2024

그와 그녀

 그녀를 절세미녀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얼굴과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덕분에 성의 있게 꾸미면 제법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해 보인다. 남편도 별 수 없는 그저 그런 남자였을까?


 남편과는 15년 전에 만났으니 사소한 부분까지도 매우 잘 알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형사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종종 보던 파트너 같은 관계라고 봐야 할까? 예전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확연히 줄었다고는 하나 수시로 연락을 하며 안부를 묻고 일정을 공유한다.


 취미도 거의 같아서 주말이나 공휴일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스크린 골프를 치거나 등산을 하고 온다. 게다가 빈번하게 점심도 먹고 돌아온다. 그럴 때면 부모로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지 못함을 보상하기 위함인지 평소에 먹지 못하게 하는 과자며 빵을 한 봉지 가득 사다가 아이들에게 선심 쓰는 척 준다.


 얼마 전엔 책상 서랍에서 그녀와 그가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푸릇푸릇할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냥 입사 동기라고 하기엔 어찌나 둘이 잘 어울리는지 애틋한 사이었다고 해도 믿을만했다. 무엇보다 남편의 어정쩡한 자세와 발그레한 낯빛을 통해 그녀를 향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왜 그와 그녀의 이런 관계를 그냥 두냐고? 그건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남편은 회사로 아이들은 학교로 집을 나서고 나자 눈에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어제 퇴근 후에도 서재에서 늦게까지 업무를 보더니 다이어리를 챙기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했겠으나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이번 주말에도 골프나 등산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주 작은' 기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결혼기념일이잖아. 설마 하니 일반적인 주말과 똑같겠어?'


 실망의 크기는 기대에 비례한다던데 예상과 달리 왜 이리 큰 허무함이 밀려오는 것일까?


 '골프 + 산'


 꾹꾹 눌러쓴 글씨체에서 단호함과 확신이 느껴진다. 짜증이 한껏 묻은 손길로 다이어리를 대충 덮으려는데 휴대전화에서 문자 알림이 울린다.


 '자기야~'


 응? 발신자는 남편인데 말투는 남편이 아니다. 무뚝뚝하기로는 국가대표 선수급인데 이런 나긋한 호칭이라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어질 문자를 기다리는데 계속 잠잠하다. 잘못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중일까?


 설거지나 해야겠다며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는데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자기야~ 으 닭살. ㅋㅋ 

미안. 문자 보내는데 자기 밑에 있었던 김 과장이 급하다며 말을 걸어서. --;

우리 처음 머리 올렸던 한라산의 그 골프장 기억나지?

주말에 거기 예약하려는데 어때?

결혼기념일이니까 우리 그때 그 기분 다시 누려보자.^^ 

사랑해~

아! 그리고 집에 내 다이어리 있지?'


 남편의 그녀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에게 답장을 보낸다.


 '진짜? 좋아~ 나도 사랑해. 다이어리는 집에 있어.'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남편과 내가 나란히 서 있는 15년 전 사진. 사진 속 나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로 온몸으로 그에 대한 감정을 발산하고 있다.


 저녁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장어구이를 준비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고의 원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