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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n 07. 2024

마법의 순간

 그녀가 나에게 준 시간이 다 되어간다.  내가 가진 매력을 발산하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춤을 따로 배운 적도 없고 박자 감각도 형편없는 나로서는 이런 자리가 사실 불편하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술의 힘을 빌려본다.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항상 돌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멋진 그의 주변에는 여자들로 빈틈이 없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혀 대화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가 보지만 한껏 치장한 경쟁자들에게 밀려나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작은 용기라도 가지게 된 것은 은밀하게 보내는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찰나의 순간마다 나를 힐끔거리는 모양새나 조금씩 몸을 돌려 결국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 것으로 짐작해 보건대 분명 그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


 새 옷과 새 구두는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마냥 불편하다. 늦은 밤 춤을 추는데 왜 굳이 이런 행색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들 비슷한 복장에 비슷한 화장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구분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자신만의 색깔을 봉인하고 복제된 유행 속으로 꽁꽁 숨어 버렸다.     


 그녀가 이런 선물을 주었을 때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으나 지금은 후회가 밀려온다. 물론 평소 복장이었다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했겠지만. 남자들도 하나같이 거기서 거기다. 그의 출중한 얼굴과 터질듯한 근육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와 유명세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눈길을 끌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신분 상승을 위해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거짓 호감을 표현하고 헤픈 웃음을 짓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마법 같은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야지. 언제까지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런저런 잡생각이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통금 시간이 임박한 풋내기 소녀처럼 굴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누군가 채가기 전에 용기를 내야 한다. 쓰레기통에 버리지도 못하는 후회를 들고 돌아가 봤자 마음만 무거워진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다가온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지만 모든 신경은 그에게 쏠려있다. 춤을 추자고 하면 어쩌지? 꼭 끼는 옷으로 인해 제대로 호흡하기도 힘들고 이마에는 땀이 배어 나온다.


 “처음 오셨나 봐요?”     

 마치 영화나 동화처럼 주변이 일순간 조용해지고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 네? 아. 네.”     

 당황하지 않은 척 애를 써봤지만 분명 티가 났을 것이다.


 “같이 추시겠어요?”     


  세상에나. 그가 내민 하얗고 긴 손가락을 붙잡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꿈만 같은 시간이 그의 품 안에서 흘렀다. 역시 오길 잘했어. 그의 체취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오자마자 연거푸 마신 알코올 때문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부여잡고 있더라도 곧 끊어져버릴 연약한 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성은 '신'이고 이름은 '데릴라'입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 곧 가야 해요.”


 “왜요? 이제 막 파티가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혹시 남편이나 애인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우리 사귑시다. 사실 첫눈에 반했거든요.”


 그가 부드러운 양손으로 내 양볼을 잡더니 가볍게 키스를 했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찔했기에.


 그리고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12시가 되자마자 나는 불 품 없는 모습이 되었고 왕자는 내 실체를 보고야 말았다. 나는 당당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고 그의 안색은 초록색으로 질려 있었다. 하지만 더 끔찍하게 놀란 쪽은 오히려 나였다.


 하녀의 몰골로 돌아간 내 앞에 왕자는 사라지고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거리는 게 보였다.


 어이없는 마녀. 어째 나한테 바라는 것도 없이 친절하더라니. 어디서 혼자 낄낄거리고 있겠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한쪽만 변하지 않은 유리 구두에 개구리를 잡아넣고 집을 향해 맨발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무너지고 그 밑에 깔려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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