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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n 17. 2024

고장 난 집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연신 내 눈치를 살피며 허둥거리는 모습 때문이었다. 처음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그의 얼굴에는 실내의 서늘한 온도와 달리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텔레비전 수리 경력만 25년이 넘는다며 잠깐만 살펴보면 바로 끝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더니 어째 바닥에 늘어놓는 부품의 수만 계속 늘어난다.


 노년의 여자라서 바가지라도 씌울 작정인가? 남편이 퇴근할 시간에 맞춰서 사람을 불렀는데 이 수리기사는 예정된 시간보다 3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게다가 길이 막혀서 평소보다 조금 늦는다는 문자까지 남편에서 온 터라 마음이 불편했다.


 “저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커다란 가방을 메고 막 집에 들어왔을 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진 이유는 어색해져만 가는 분위기를 바꾸고 남편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볼 요량이었다. 아까는 정중하게 거절했던 수리기사가 이번에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시원한 커피를 보리차 마시듯 한 번에 쭉 들이켜더니 곧바로 다시 텔레비전을 들여다본다. 흡사 드라마에서 보던 비장한 수술 장면이 떠오를 정도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그는 지금 환자를 살리기는커녕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구입한 지 이제 고작 두 달 밖에 안 됐는데 말이죠. 딸과 사위가 큰맘 먹고 선물해 준 건데.”


 텔레비전을 설치하는 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하면서 외동딸이 준 명함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보챌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째 모양새가 다그치는 꼴이 되었다. 그러자 그가 드라이버를 바닥에 툭 던진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신경질을 내던 남편의 모습이 얼핏 오버랩된다.


 “아, 진짜 짜증 나네.”


 나보고 들으라는 말인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 짧은 문장에서 덜컥 두려움이 솟았다. 그리고 점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천천히 하세요. 수리만 잘되면 되니까요. 하하.”


 어색한 미소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는 환기가 되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옆집 아기 엄마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옆 단지에서 있었던 일인데 인터넷 설치기사인 줄 알고 집에 들였다가 강도를 당했다는. 이제는 내 등에서도 땀이 흐른다.


 “아줌마, 이쪽으로 와서 이거 좀 붙잡아 봐요.”


 “네?”


 선한 인상으로 보였던 주름진 얼굴을 다시 보니 무수한 흉터를 그 속에 숨긴 악랄하고 험악한 가면 같았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진동음이 울리는데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일까?


 “여기가 문제 같은데 손이 모자라서. 빨리 좀.”


 말투도 변했다. 친절하게 들렸던 저음의 목소리가 범죄자에게 어울리는 협박조가 되었다.


 “저, 저는 그런 거 하나도 몰라서요. 눈도 침침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다시 손에 집어든 기다란 드라이버는 흉기가 될 것이 뻔했다.


 “남편은 언제 집에 옵니까?”


 헉! 큰일이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나를 방어할 마땅한 무기가 없는지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방 서랍에는 칼이 있고, 서재에는 남편의 골프채가 있지만 그걸 가지러 가기에는 너무 멀다. 거실 한편 바닥에 운동할 때 쓰는 1Kg 무게의 핑크색 아령이 두 개 놓여있지만 그건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괜한 행동으로 그를 자극하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딩동.


 갑자기 울린 소리에 깜짝 놀라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 그 소리가 구원이 될 거라는 희망이 들어찼다.


 “잠깐만. 기다려!”


 이 사람 수리 기사인척 침입한 강도가 분명해. 나에게 다급히 다가오는 손길을 무시하고 바로 현관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거실 바닥에서 일어나던 그가 뭔가 체념한 듯 보이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다. 순순히 포기해 줘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서비스 기사입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현관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말에 소름이 쫙 끼치며 주저앉을 뻔했지만 용기를 쥐어짜 내달렸다.


 “살려주세요. 강도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니폼을 입은 진짜 서비스 기사가 끼어들었다.


 “아이고, 형님. 제발 먼저 오지 말라니까. 의욕도 좋지만 옛날 기술 가지고 그렇게 무턱대고 덤비면 안 돼요. 아, 벌써 저 지경을 만들어놨네. 브라운관 텔레비전하고 요즘 제품은 정말 다르다니까 왜 자꾸 사고를 쳐요. 그리고 전화는 일부러 안 받았죠?”


 “아니, 옛날에는 툭툭 치기만 해도 마법처럼 멀쩡해졌는데. 그나저나 어쩌지, 지금 상황 수습이 될까?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는 강도, 아니 나이 드신 서비스 기사를 보며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갔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해 드리겠습니다. 형님은 지금부터 그냥 내 옆에 서서 잘 보세요.”


 완전히 무장해제 된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소파에 앉으며 허탈하게 웃었고, 새로 온 서비스 기사는 긴 드라이버를 꺼내며 물었다.


 “형님. 지금 이 집에 우리만 있는 거 확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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