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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은 설국열차를 타고

도토리 출장수집_여행기

by 치프람

❄️ 우정은 설국 열차를 타고

“치프람, 설국열차 타러 올래?”

현재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S가 말했다. S는 중국 최북단 모허 지역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곳은 하얼빈에서 무려 17시간을 달려야 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가야 한다. 유럽 여행 때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라 처음엔 거절했지만, S가 귀국하기 전에 한 번은 보러 가려고 했던 계획도 있었고, 올해 내 큰 목표 중 하나가 ‘불편한 것에 정면으로 부딪혀보기’였기도 하여 결국 마음을 바꿔 중국행 티켓을 끊었다.

친근한 풍경이겠지만 여기는 모허입니다. (영월 한반도 지형 아님 주의)

❄️ 낭만과 불안 사이

사실 이 여행은 나에게 단순한 여행이라기보다는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내 치명적인 취약점들이 한꺼번에 모인 종합 선물 세트였으니까.

첫 번째는, 낯가림이 심한 내가 처음 보는 두 명의 시안걸즈와 4박 5일 여행을 간다는 것.

두 번째는, 평소 여행에서는 파워 J인 내가, 자아를 놓고 P 여행을 즐기겠다고 준비 없이 떠난 것.

마지막으로, 자타공인 추위를 두 배 이상 많이 타는 체질인 내가, 가장 극복하기 힘든 불편함인 '추위'와 '겨울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

이 모든 것이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낭만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이번 여행에서 어떤 곳이 제일 좋았어?”란 직장 동료의 질문에, 나는 “모든 곳이 좋았어. 발길 닿는 모든 곳이 낭만 가득이었거든.”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이 여행의 절반은 이동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눈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낭만을 한 스푼 곁들여 본다면…

야간열차에서 처음 만난 인연들과 함께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왁자지껄 보드게임을 하며 놀다가도,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

그 각자의 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같은 음악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반복해서 들으며, 내가 원하는 만큼 실컷 달을 감상할 수 있는 것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지나고 나면, 눈부신 설국이 반겨주는 것

아침에 일어나 꼬질하고 망충한 모습으로 컵라면을 먹는 소박한 나와, 근사하게 눈 이불을 덮은 자작나무 숲의 대조적인 풍경을 발견한 것. 평소 출근 준비에 쫓기던 시간 속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사치스러운 아침이었다.

사진은 흐릿할지언정 내 눈엔 선명히 담겼던 풍경


❄️ 유일하게 맛없었던 건 블루베리 와인과 얼린 배

나를 잘 아는 내 직속 상사는 중국 음식이 내 입맛에 완벽하게 맞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편식 여왕인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라며 반신반의했지만 이게 웬걸? 정말 모든 음식이 다 내 입에 맞았다. 하얼빈에서 먹은 꿔바로우(본고장이라고 하니 이건 먹어야 한다며 3번은 먹은 것 같다), 훠궈, 동북 지방의 가정식, 간이음식점 음식, 숙소 조식, 아침 시장의 음식까지. 혹시라도 위에 탈이 날까 봐 한국에서 야무지게 챙겨 온 가스활명수를 저녁마다 마신 건 안 비밀. 내가 부족함 없이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게 해 주기 위해 애써줬던 시안 걸즈들에게 “뭐가 제일 맛있었어?”란 질문에 간이음식점의 계란부침이라고 차마 대답하지 못해 “다 똑같이 맛있었어.”라고 말한 것도 안 비밀. 유일하게 내 입맛에 맞지 않았던 음식은 얼린 배와 S가 2병이나 산 블루베리 와인은 비밀이라고 해야하나. 허허.

이번 여행 내 최애 음식 계란부침(왼쪽하단)�


❄️ 하얼빈의 화려한 마지막 밤 (feat. 빙설대세계)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은 하얼빈 빙등제(빙설대세계)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춘절과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라 방문객들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특히 500m, 300m 얼음 미끄럼틀은 도파민을 팡팡 터뜨릴 정도로 짜릿했다.

음~가속노화의 맛 쏘 딜리셔스~

마지막으로 탄 관람차에서는 나도 모르게 떠오른 인연 때문에 마음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그 인연에 대한 감정은 빙설처럼 얼었다가 녹은 것일까. 깔끔하게 비워낸 듯했지만 차마 다 털어내지 못한 부스러기만큼 남겨진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부스러기만큼 남은 인연이 맞았나 보다. 중국 여행 기념으로 기념품을 사준다고 골라보라는 S의 말 덕분에 내 시선은 금세 굿즈들로 향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달랬을까.


❄️ 시안걸즈와의 여행, "서로 박자만 맞춘 편"

S는 우리의 여행이 행복했던 비결을 ‘놈놈놈(순록에 미친놈, 썰매에 미친놈, 만두에 미친놈)들’의 상성이 잘 맞아서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서로 모난 사람이 없었다든지, 상성이 잘 맞았다고 말하기엔 난 너무 고슴도치 같은 인간이니까 그 가설은 성립할 수 없다. 대신, 나는 우리가 ‘서로 박자만 맞춘 여행’이었기 때문에 행복한 여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표현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어른, I님이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말이라고 알려줬던 내용이다. '화음까지 맞출 필요 없어요, 박자만 맞추면 되죠.' I님도 직장 선배에게 이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서로 화음을 맞추려고 하면 누가 틀렸는지에만 집중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박자만 맞추고 각자가 리듬에 맞춰 즐기다 보면 서로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거다. 처음엔 이 추상적인 말이 어떻게 실현될지 궁금했는데, 이번 여행이 바로 그 경험이 된 것 같다.

각자 순록과 만나는 것, 썰매 타기, 만두 먹기라는 마지노선만 충족되면 우리는 조금 불편하거나 예상과 조금 다르게 흘러가도, 즐겁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시골이라 화장실이 더러워? 그렇다면 우리는 화장실 감별사가 되어 화장실마다 점수를 매겼고(이 화장실에 대한 제 점수는요~), 눈이 많이 쌓인 지역인데도 눈썰매 타는 곳이 없어? 비탈길에서 버려진 박스로 대신 타면 그만이었으며, 얼음 미끄럼틀 더 타고 싶지만 너무 춥고 피곤한 동료가 있을 땐, 한번 타봤으니까 만족하고 "우리도 피곤했는데 잘됐다, 얼른 들어가 쉬자!"라고 숙소에서 따듯함을 즐겼던 우리.

만약 음식점에 만두가 없다면? 그건 안 된다. 마지노선이라고 했잖아. 만두는 먹어야 해. 실제로 어떤 음식점에 가도 ‘만두 시켜줄까?’라며 먼저 물어봐 줬던 쏘스윗걸들에게 감동받았고, 그럼에도 매번 ‘오늘이 중국에서 시켜주는 마지막 만두야~’라며 놀리는 쏘짖굳은걸들 덕분에 웃음이 났다.


❄️ 삐걱거리기 시작한 밤

빙등제를 즐기고 돌아오니 거의 밤 9시쯤 되었고, 시안 시스터즈는 피곤해서 먼저 숙소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과제를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나는 S와 함께 3일 동안 쓴 휴가 동안 자리를 지킨 부서원들과 관련 부서 분들께 드릴 선물을 고르고 싶었다. 너무 대충 고르지 않으면서도, 캐리어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품질의 것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몇 개만 결제를 했을 때, 직원분이 중국어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비록 추가 구매를 유도하는 말일지라도, 열심히 설명해 준 만큼 대응을 해주고 싶은데, 정말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니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 거야~”라고 혼잣말하며 S를 빠르게 찾았다. 직원은 허탈해 보였고 다른 직원에게 하소연하는 듯했다. 급하게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나를 보고 와준 S는 답답했겠지만, 내가 한국어로 그렇게 말을 해버리면 그들도 뉘앙스를 캐치할 수 있어서 기분이 상했을 거라고 말했다. 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나도 말하면서 아차 싶었지만, S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내가 잘못했다는 걸 꺠달았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고, 과제는 다 끝내지 못했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걸 재차 깨달았다. 심지어 의도와는 정반대로 남의 기분만 상하게 하고… 여러모로 속상한 마음을 안고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치프람, 지금 속상하지.”

.

..

메구 같은 지지배. 나를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삐졌지’라든지, ‘화났지’라든지 ‘서운했지’가 아닌 ‘속상하다’라는 당시 내 감정의 가장 정확한 표현을 해 준 S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웅 나 너무 속상해ㅠㅠㅠㅠㅠ”라고 꾹 참았던 감정이 터졌다.

“뭐 때문에 속상한지 알겠는데, 거기에 내가 일조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리네. 이번 여행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서 치프람이 하고 싶은 걸 많이 못 해서 미안해. 다음에 놀러 올 땐 하고 싶은 거 더 많이 하자.”

고마워, 그런데 사실 난 하고 싶은 거 너네 덕분에 다 했지요. 과제를 못 끝냈을 뿐.

속상한 마음 안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렇게 예뻤구나


❄️ 효도여행 절망편 등장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항상 여행 리스크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1) 휴대폰/여권 도난, 상해

자고로 비즈니스의 마무리는 대금 회수인 것처럼, 나의 모든 여행의 마무리는 여행이 끝난 후 해외여행보험 환급금을 받을 때이다. 다행히 이번 여행도 무탈하게 마무리됐다.

2) 효도여행 절망편

부모님의 국내 여행일 땐 이런 일이 잘 없는데, 해외 자유여행을 할 때는 유독 문제가 생기곤 한다. 국내에서는 모두가 말이 통하고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어 효도여행이 비교적 수월하지만, 해외에서는 나도 낯선 곳이라 많은 정보를 알아봐야 하지만, 부모님들은 전적으로 나에게 의지하시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질문세례를 날리시곤 한다. “나도 잘 모르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 찾고 있잖아!”라며 초조함+짜증이 섞인 답변을 하다 보면, 부모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감정적이 되어 서로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 여행지를 누비는 것. 이게 내가 예상한 이번 여행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하필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밤부터 아침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시나리오 속 부모님의 역할을 맡고 S가 자녀의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새벽 시장까지 다녀와 쉬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며 모든 일정을 함께 해준 S는 너무 지쳐 보였고, 내가 너무 짐이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실은 말이야. 나도 불편한 마음을 계속 안고 있다 보니 지쳤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 더 웃고 말을 많이 했는데, 나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피하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나도 더 이상 무리해서 괜찮은 척하는 화장을 지우고 싶어서 입을 다물고 급하게 국제선으로 향했지 뭐야. 기운의 변화를 느꼈던 걸까. 공항에서 헤어진 직후, S가 “서운한 게 있었다면 중국에 다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라고 카톡을 보내왔을 때, 내가 서운한 게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상황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이 내 무능력함과 좌절감, 그리고 용기 없었던 내 태도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무리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헌정한다는 S의 여행기를 읽으며 금세 감동받아 코끝이 찡해졌다. 서로의 진심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어찌 보면 교훈도 얻을 수 있는, 영양가 만점의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처럼 내가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묵묵히 뒤에서 서포트하며 나를 지지해 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이 밀려오는 밤이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올해 목표 중 하나였던 “불편한 것에 정면으로 부딪혀보기”가 이렇게 이루어졌구먼. 일부러 거리를 두었던 겨울과 추위에 스스로 한 발짝 다가간 여행이었다. 자세히 보려고 하니 겨울과 추위라는 친구의 장점과 고마움이 보이더라. 추운 날씨 덕분에 새벽 시장에서 먹은 따끈한 만두가 두 배로 맛있었고, 겨울이 있었기에 설경을 만끽할 수 있는 낭만열차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도 특별한 순간 속에서도 항상 함께해주고 응원해주는 S에게,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종종 잊을 수 있는 인연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S야 올해도 잘 부탁해:)


작은 심장인 날 데리고 다녀준 S와 시안걸즈들에게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제가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시안걸즈들, 언젠간 내가 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니? 내가 내 나와바리에서 치프람 투어를 기획할게, 비행기표는 누가 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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