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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이슈 Oct 14. 2021

사랑했어, 엄마 #3 누굴 닮았겠어

누굴 닮았겠어



 “넌 부모님 두 분 중에 누구 닮았어?”

 

 엄마와 아빠 중 누구를 닮았느냐는 질문에 늘 아빠를 닮았다고 대답하고는 했다.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속설처럼 아빠의 어렸을 적 모습과 똑 닮은 나다. 어렸을 적 엄마의 손을 잡고 나가면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네 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곤 했다. 키도 크지 않고 피부도 까만 편이고 욱하는 성격에 성질도 불같은 부분까지 아빠와 똑 닮았다.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느긋하고 온화한 성격의 엄마와는 참 달랐다. 누가 보아도 나는 그냥 아빠 딸이다. 얼핏 본다면 그렇다.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엄마와 비슷한 구석도 찾을 수 있다.




 엄마는 키가 컸다. 지금도 여자 키 170이라고 하면 큰 편인데 엄마가 젊었을 적에는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키가 크지 않은 아빠와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아 언제나 굽이 거의 없던 신발만 신던 엄마였다. 그런 큰 키만큼 다리도 길고 손가락도 길고 대체적으로 다 길쭉길쭉했다. 그와 다르게 얼굴은 엄청나게 작아서 엄마가 앉아있는 상태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엄마가 키가 큰 사람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서면 예상치 못한 큰 키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더랬다. 엄마는 얼굴만 작은 것이 아니라 발도 작았다. 그 큰 키에 발은 앙증맞게도 240사이즈였다. 그 큰 키를 작은 발로 지탱해 걸어 다니려다 보니 자주 넘어지곤 했었다고 한다. 그 부분을 내가 닮았다.


 내 키는 160으로 한국 여자 평균 키지만 작다며 작다고 할 수 있는 키이다. 키가 큰 엄마와 다르게 키가 작은 만큼 발은 더욱 작은 225 사이즈이다. 발이 작아서 좋은 점도 있는데 세일 제품 중에 내 발 사이즈의 신발은 품절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여차하면 아동요 신발도 신을 수 있어서 신발을 편하게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나쁜 점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굉장히 잘 넘어지는 편이라는 것이다.


 다섯 살쯤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의 어린 나이에 엄마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내가 넘어져 볼부터 이마까지 바닥에 쓸려 크게 상처가 난 적이 있었다. 상처가 크기만 했지 그 상처가 아팠던 기억이 없었던 만큼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울지도 않았다. 엄마는 울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손도 제대로 잡지 않고 걸었는지라고 하며 한참을 자책하며 울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 기억난다.

 사색이 된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약국으로 향했다.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받게 해서 얼굴이 소독약과 마데카솔로 뒤범벅되었다. 그 뒤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때의 상처로 인한 어떤 흉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엄마가 연고를 열심히 발라줬으리라.


 그 뒤로도 나는 참 많이도 넘어졌다. 딸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기만을 바랐던 엄마의 그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참 많이도 넘어졌다.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내 무릎엔 넘어져 생긴 여러 흉터가 가득하다. 요즘에야 잘 너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나이가 어느 정도 먹었기 때문인지 밖을 나돌아다니는 빈도가 적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식을 잘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야 모두 같으리라 생각된다. 여느 엄마처럼 우리 엄마도 그랬다. 아니, 유달리 더 먹는 것을 중요시했다. 아마 이 부분은 아빠의 영향도 꽤 컸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같은 반찬이 두 번 이상 먹지 않았고 식탁 위에는 다섯 가지 색깔이 있도록 먹어야 한다고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정작 아빠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의사였던 아빠라 건강에 관련한 것은 반박할 수도 없었으며 워낙 에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고집불통인 아빠였으니 엄마는 곧이 곧대로 따랐다.


 어쨌든 그런 아빠의 요구와 딸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잘 크기를 바랐던 마음이 합쳐졌다. 엄마는 모든 끼니를 언제나 제대로 챙겼다. 신선은 물론이고 유기농인 식재료로 탄수화물, 단백질, 식이섬유, 비타민 등등 각종 영양소가 조화롭게 밸런스를 이룬 식탁이 차려졌다. 이른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 중학교 학교 선생님었던 우리 엄마다. 시간에 매일 쫓기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을 차려주었다. 나에게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하고 아내가 되면 우리 엄마가 그러하였듯 당연히 그렇게 매일 식사를 차려야 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결혼울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엄마가 했던 대로 아침을 차렸다. 물론 엄마만큼 그 구성이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엄마가 그러했듯 아침을 잘 챙겨 먹어야 몸에 좋다는 생각이 그 바탕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더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식사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일인지 그제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런 큰 수고가 들어가는 일을 엄마는 몇십 년이나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혼자 먹는 음식이었다면 절대 그 정도의 정성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침 식사가 다 차려질 때쯤에는 굉장히 지쳤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면 이 정도 쯤이야라고 싶었다. 아, 우리 엄마도 이랬겠구나 싶었다.


 당연히 남편도 아침 식사를 좋아하리라고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정성 들여 차린 식사였지만 남편은 도무지 먹지를 않았다.

 집집마다 식사문화가 이렇게나 다르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야 절실히 깨달았다. 늘 밥보다 잠이 더 우선인 남편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아침을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 때문에 불편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같이 살고 나서야 식사 방식과 너무 다른 사람이랑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같이 살아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함께 먹으려고 차린 식사를 혼자 먹으려니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상은 번번이 차게 식어 냉장고로 들어가거나 버려지기 일쑤였다. 열심히 차린 아침을 먹지 않는 것, 그게 그렇게나 섭섭한 일일 줄 몰랐다. 어린 시절, 종종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부리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엄마 나 때문에 참 섭섭했겠구나.


 매일은 아니지만, 요즘에는 남편이 나와 함께 아침을 먹는다. 그전과는 달리 간소한 아침 식사다. 토스트, 샐러드, 스크럼블에그, 오믈렛, 소시지, 베이컨, 시리얼 등등 양도 많지 않고 수고스럽지 않은 메뉴들을 준비한다. 차려진 아침 식사 앞에서 남편과 자주 하는 대화가 있다.


 “오늘 아침 거해?”

 “응. 거해.”


 더 먹이고 싶고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을 줄이고 줄여 차린 식탁임에도 그렇다. 진짜로 거한 아침 식탁을 보아온 나로서는 그저 웃는다.




 어린 시절에 엄마와 아빠를 볼 때면 머릿속으로 늘 의문이 들곤 했다.


 ‘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을까?’


 어린 나의 눈으로 보았던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마는 아빠를 돌보느라(?)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엄마가 식사를 차려 놓으면 아빠는 부스스 일어나서 숟가락만 들었다. 식사가 끝나면 엄마가 아빠의 출근 준비를 도왔는데 옷을 꺼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양말까지 신겨주었다. 아빠보다 퇴근 시간이 빨랐던 엄마는 먼저 집에 와 저녁 준비를 하고 아빠가 집에 올 때쯤 만일 짐이 있다면 엄마가 내려가서 그 짐을 들고 올라왔다. 형광등을 갈거나 텔레비전 리모컨의 건전지를 가는 잡다한 일들까지 모두 엄마 몫이었다. 심지어 아빠의 손톱과 발톱을 엄마가 깎아주는 일도 허다했다. 워낙 까다로운 아빠였음에도 엄마는 불평불만 하나 없이 아빠가 원하는 것들을 다 맞춰주었다. 나와 동생을 돌보는 것도 바빴을 텐데 아빠에게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맞추어주던 엄마다. 엄마는 아마 자기 시간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흘러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엄마에게 왜 그랬었는지 물었었던 것 같다.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엄마가 있다면 다시 물어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다.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을지는 예상할 수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당시에 나는 엄마처럼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나는 엄마가 했던 대로 아침을 차렸다.’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엄마처럼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은 이미 글러 먹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살면서 내 생활의 상당 부분을 남편에게 맞추어가며 살고 있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남편의 입맛에 맞춘 식사와 불규칙한 식사는 물론이고 새벽형 인간이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나였는데 어느새 제멋대로의 생활패턴을 살고있는 남편에게 맞추어 해가 떠 있을 때 자고 해가 지면 일어난다. 집안일을 질색하고 청결과 정리의 필요라고는 모르는 남편이라 집안일의 99.9 퍼센트를 담당하고 있는 나다.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는 말인데 나도 직장이 있으며 남편과 나의 생활비 부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반반 부담이다) 술마시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페스티벌에 가는 것을 좋아하던 나인데 언젠가부터 밤새도록 하는 PC게임을 하거나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나의 삶의 큰 부분이 남편에게 맞추어져가고 있다. 물론 남편도 나에게 맞추어 주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 아빠도 분명히 엄마에게 맞춰준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 결혼 생활을 이야기하면 언제나 네 남편은 부인 잘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사람 일이라는 것이 한쪽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 되고 쌍방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나도 늘 내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내가 보았을 때도 나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내 남편에게 맞춤 부인으로 잘하기 때문이다. 종종 남편과도 내가 정말 좋은 부인이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나에게 절을 한다.(귀여워라:)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딸을 낳은 우리 엄마에게 감사하라고 이야기한다.




 다행이다. 내가 엄마 딸이라서. 엄마를 닮은 부분들이 있어서. 내가 엄마를 닮은 부분을 많이 찾을 수 있어서. 엄마를 닮은 이 부분들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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