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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이슈 Oct 18. 2021

사랑했어, 엄마#4 토닥임의 부재

토닥임의 부재

 늘 기쁘고 즐겁기만 하면 좋겠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그로 인해 속상한 일을 겪게 되는 일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마음 아픈 일을 겪곤 한다. 몸이 아플 때는 그 증상에 맞춘 치료를 하면 된다. 배가 아프면 배탈약을 먹으면 되고 넘어져 피가 나면 연고를 바르면 된다. 이렇게 몸이 아플 때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해결책이 너무나 명확한데 마음이 아플 때는 이렇다 할 정확한 해결책이 없다.


 속상한 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끙끙 앓기보다는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나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실들을 실천할 수 있기만 하다면 좋으련만 나는 그럴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계획했던 일들이 조금만 틀어지고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그로 인한 타격을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받는 편이었다. 지금이야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화가 나지도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매사에 덤덤해졌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는 온갖 일들에 속상해했다. 그 정도가 심각한 정도였는데 오죽하면 초등학생 때 준비물을 깜빡하고 챙겨가지 않은 날에 담임 선생님이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속상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칭찬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딸을 키우는 우리 엄마 참 고생 많았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 사소한 부분에 속상함을 느낄 정도라면 중요한 부분에서라면 과연 어떤 상태였을지 대강 예상할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일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보면 별거 아니었네 싶은 일들이 참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학창 시절 친구와 다투었던 일이라던가 지갑을 잃어버린 일이라던가, 시험을 망친 일이라던가 살다 보면 한 번쯤 겪을만한 가벼운 고난에 얼마나 유난을 떨었던지 창피할 정도다. 어리석게도 세상이 멸망한 듯 속상해했었고 하늘이 무너진 듯 슬퍼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일들도 참 많다. 그렇지만 내게 속상하고 힘든 일들을 겪고 슬퍼하고 있을 때마다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말만큼은 굉장히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괜찮아.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엄마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나에게는 늘 있었다. 어떤 실수를 하고 문제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난 내 편이 있었으니 괜찮았다. 지쳐서 힘들 때는 기대 쉴 수 있는 엄마가 있었다. 슬픔에서 빠져나와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늘 힘을 낼 수 있도록 다독여주는 엄마가 있었다. 그 따뜻한 토닥임 덕분에 크고 작은 슬픔들에 타격을 적게 받고 이겨낼 수 있었다. 내 일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사경을 헤매는 그 순간까지 나를 위로했다.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엄마 안 죽는다면서 내 등을 토닥였다.




 그 이후 한동안은 그냥 슬펐다. 자고 일어나도 창문을 열어도 엘리베이터를 타도 길을 걸어도 눈을 감았다 뜨는 것도, 그냥 세상만사가 슬프기만 했다. 그렇게 슬픈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오랜 시간 동안 슬퍼하고 있어도 슬픔을 벗어나도록 나를 토닥여줄 엄마가 없었다.


 내가 슬퍼할 때면 남편도 함께 슬퍼했다. 위로하고 달래고 안아주며 내 슬픔을 함께하려 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자신이 받아줄 만큼 받아주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내가 계속 슬퍼하면 남편은 뒤돌아섰다. 내 슬픔에 지친 남편과 슬픔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 둘이 싸우는 일도 잦았다. 슬픔이 더 커졌다. 점점 남편 앞에서 슬프지 않은 척 숨기게 되었다. 슬픈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슬픔에서 빠져나올 만큼의 토닥임은 이제 없었다.


 이대로는 슬픔에 묻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엄마가 그리웠다. 슬픔을 떨쳐내려고 일부러 여러 가지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을 하려 했다. 여행을 가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도망쳤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슬픔이 폭발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레 슬픈 감정은 무뎌졌다.

 얼마 전부터는 애써 즐거운 일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이전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감정으로 돌아왔다. 이전보다 슬픔을 느끼는 일들도 줄고 속상함을 느끼는 부분도 적어졌다. 다행이다. 이제는 토닥임 없이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속상한 일들과 슬픈 감정이 아예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토닥임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없어도 버틸 수 있다.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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