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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이슈 Oct 24. 2021

사랑했어, 엄마#5 함함한 내 새끼

함함한 내 새끼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식을 낳고 나면 대부분의 부모가 하는 착각이 있다고 한다.


 “어머, 우리 애가 천재인가 봐요.”


 어느 부모의 눈에나 자기 자식은 대단하게 보이나 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는 옛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엄마도 그런 고슴도치 부모였다.


 엄마가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는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대단히 추운 날씨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본 내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 할머니 나물을 사주면 안 되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사달라고 했던 적이 없던 어린 딸이 그러는 모습에 엄마는 깜짝 놀랐다. 나는 기억조차 못 하는 어린아이일 때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해주며 엄마는 내가 큰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 기대에 무색하게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었던 우리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태교를 위해 수학의 정석책을 풀었다고 한다. 항상 전교 일등을 다투었던 엄마와 고등학생 때부터 제대로 공부해 경희대 한의대를 간 아빠, 이 머리 좋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니 당연히 똑똑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런 딸을 잘 키우고 싶었던 우리 엄마는 워킹맘이라 그렇지 않아도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온갖 분야를 다양하게 배웠다. 발레, 피아노, 영어, 수영, 검도 등등 학원에 다녔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어떤 동작을 했었는지 무슨 내용을 배웠는지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저 교실 뒤편에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바라보던 엄마 모습은 어렴풋하게 그려진다. 아마 무언가에 특별한 재능이 없었으니 어느 정도 하고 말았으리라.

 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학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로는 모든 과목에 대한 학원에 다녔다. 공교육에 종사하고 있던 엄마가 자기 자식을 사교육에 열성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다. 그만큼 딸이 잘되기만을 바랐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열성 덕에 중학교 입학 후 첫 시험은 전교 7등이라는 성적을 거두기도 했고 과학 영재반에 들어가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아마 역시 내 딸이구나 했을 것이다.

 그대로 계속 학업에 관심을 쏟았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사춘기가 온 것이다.


 교직에 오래 몸 담고 있던 엄마는 교우관계에서 문제를 겪는 아이들을 오랜 시간 동안 여럿 보아왔다.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들과의 문제가 생길까에 대한 염려가 늘 마음속에 있었고 그런 마음은 친구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차단하는 방법을 취했다. 아예 친구와 놀지 못하게 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들끼리 먼 곳을 간다든가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던가, 이런 부분을 통제했었다. 하지만 이런 통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 때야 학교에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고 아직까지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를 때니 가능했지만, 중학교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학교에 학원까지 다니다보니 집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데다가 엄마도 직장이 있다 보니 온종일 딸들만 신경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고 보니 별천지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길어졌다. 공부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만큼 하고 싶은 것들도 늘어났다. 책상 앞에만 앉아있기에는 세상에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공부에 흥미를 점점 잃으니 당연히 성적도 점차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니던 중학교가 수행평가 양이 워낙 방대하여 공부와 병행하기에 부담된다는 것도 성적이 떨어진 한 가지 핑계 중 하나였다.

 엄마는 결심하게 된다.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기로, 학군이 좋은 동네로 이사를 하기로.


 그렇게 중학교 2학년부터는 학군의 중심지 대치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업을 위해 이사를 감행한 만큼 처음에는 나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으로 가고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공부의 연속이었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한 학원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하나가 마치면 엄마가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로 다음 학원으로 데려다주고 밥도 차 안에서 먹으며 이동했다. 그렇게 하니 당연히 성적은 다시 올라가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내가 그 생활에 너무 빨리 지쳤다는 것이다.

 이미 친구라는 신세계를 맛보았는데 공부에만 열중해 있기란 불가능했다. 친구들이 하는 것은 다 하고 싶었고 그만큼 세상이 갑자기 넓어 보였다. 그런 딸의 변화를 엄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사인 엄마에게는 착실한 학생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있었다. 염색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에 화를 냈고 귀를 뚫고 집에 들어왔을 때는 뺨을 맞았다. 어느 날은 다음 학원으로 가기 위한 차 안에서 엄마에게 춤을 배워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울었다. 그때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엄마에게는 공부 외에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


 그 깨달음 뒤에 착실하게 공부만 했으면 좋으련만 이미 다른 즐거움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나였다. 학원을 빠지고 숙제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노래방이며 만화책방이며 몰래 다니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당연히 엄마도 그 사실을 알았다. 엄마에게 혼도 나고 종종 맞을 때도 있었다. 엄마와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공부가 아니면 뭐든 좋았다. 그런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으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고3이 되었다. 그제서야 공부의 필요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만큼 미친 듯이 공부했었다. 막바지에는 모의고사에서 한두 개 정도 틀릴 정도로 성적이 올랐다. 엄마가 쏟아부은 학원비와 과외비 덕에 가능한 결과였다.


 수능 당일,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을 들고 시험을 치러 갔다. 2010년도 수능을 쳤던 이라면 알 것이다. 그 당시 준 수능 샤프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한 글자를 채 다 쓰기도 전에 샤프심이 뚝뚝 부러졌다. 1교시 언어 시험 시간, 지문을 읽을 때 줄을 치며 표시해 문제는 푸는 습관이 있던 나는 그 샤프를 사용하며 문제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샤프를 나만 사용한 것은 아닐 테니 그 샤프 탓에 시험을 못 봤다고 하는 것이 핑계긴 하다. 어찌 되었든 그 뒤에 이어진 시험에도 영향이 있었다.

 수능 성적이 나온 날, 펑펑 울었다. 예상보다 낮게 나온 점수에 대한 실망과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좌절했다. 방 밖으로도 나오지도 않고 식음도 전폐한 채 울고 또 울었다. 실패한 인생이 된 것만 같았다.

 며칠 뒤 엄마와 아빠는 방에 처박혀 있던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몹시 추운 날이어서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나갔던 것 같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낙성대공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


 “낙성대공원이야. 저 앞이 바로 서울대야. 엄마는 너가 마음만 먹으면 서울대 갈 수 있다는 거 알아. 너가 하고 싶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그리고 대학?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에서 대학이 다가 아니야. 엄마, 아빠 돈으로 가게 내줘도 돼. 그 정도 능력 있는 부모니 걱정하지 마. 너가 어떤 선택을 하든 무엇을 하든 엄마는 우리 딸 편이야.”


 엄마는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에 발끝에 감각이 없어질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앞날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겨울바람에 노랗게 시든 잔디 위로 눈이 부시게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햇살이 참 예뻤다. 잘 살아야지, 열심히 살아서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코끝이 쨍하게 시렸다.


 허무하게도 그 다짐은 채 몇 달도 가지 않아 사라졌다.


 수능을 망치고 요란하게 슬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성적을 맞춰 간 대학에서 적응을 잘해도 너무 잘했다. 학생회며 모임이며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미성년자일 때에는 금지였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자 모든 것이 좋기만 했다. 특히, 술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 근심, 걱정이라고는 없었다. 그렇게 흥청망청 대학생활을 보내던 도중 엄마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도 처음에야 심각하게 생각했지 시간이 흐르자 무뎌졌다.


 나는 내 삶을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다. 내가 나아가는 모든 단계마다 엄마는 자기 일보다 기뻐하고 행복해했다. 그런 엄마를 두고 나는 내가 더 우선이었다.


 막연히 엄마는 나을 거라고, 완치될 거라고,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엄마가 있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되었을 때 엄마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원래도 잠이 많기는 했지만 잠을 자느라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고 대화를 할 때 미묘하게 이야기의 흐름이 어긋나곤 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야위어갔고 힘을 주어 잡으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앙상하게 뼈만 남은 엄마의 몸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 이상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러다 다시 나아질 거라고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더 이상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매일같이 엄마를 보러 갔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 살기 바쁘다고 힘들다고 하는 건 다 핑계였던 거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가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기뻐했다. 사랑스러운 딸이 왔다며 행복해했다.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그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루하루가 아쉬웠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엄마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 자랑하며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못난 딸이지만 우리 엄마 눈에는 함함하기만 했나 보다.


 엄마가 생각한 만큼 나는 좋은 딸도 훌륭한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모자라고 부족한 것들 투성이다. 엄마가 들인 시간과 돈 거기에 무엇보다 큰 사랑에 못 미치는 사람으로 자랐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잘 자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시원하게 대답하지도 못한다.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그런 사람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미 살아온 삶을 다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산다고 해도 그보다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지는 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다. 엄마에게만 함함한 딸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함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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