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을 처음 본 게 아마 2년 전쯤 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여름이었다.
녀석이 자주 출몰하던 그즈음의 찬란한 여름 저녁노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휴대폰 사진 폴더를 뒤져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사진을 찾아냈다.
찍은 날짜가 2021.7.25.이다.
그 녀석이 사료를 먹다가 자기 아빠를 타 넘는 사진에 눈길이 멎었다.
우리 가족들과 눈만 마주치면 자그만 몸으로 경쾌하게 허공을 가르며 우다닥 도망을 다녀서 <우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녀석도 물려받은 야생의 유전을 주체하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 주변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자기 아빠의 테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름밤, 담장에 핀 하얀 박꽃을 보고 떠날 때를 알았을까?
2년이 지나서 그 녀석이 홀연히 다시 나타났다.
여름 아침의 상큼한 햇살에 노랗게 웃어대는 수세미 꽃을 보고 돌아올 때를 알았을까?
우다의 아빠가 어렸을 때,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 우리 집에 홀연히 나타날 때도 마당 한편에 채송화 꽃이 형형색색으로 만발한 따가운 여름이었다.
말랑말랑한 아기 고양이가 2년이 지나 청년의 튼실한 몸으로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났을 때 노란 털 색깔과 유달리 가늘게 보이는 꼬리 끝부분을 보고 ‘풍요의 아들이 나타났구나.’하고 생각했다.
녀석의 아빠 이름이 <풍요>다.
우다가 우리 집 주변에 다시 언뜻언뜻 보이다가 며칠이 지나자 현관 앞 사료 그릇 앞에서 풍요와 함께 나란히 식사를 즐기는 것을 보았다.
‘풍요가 자기의 아들에게 앞으로의 거처를 물려주려고 저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우리 집에 드나드는 횟수가 줄어들면서도 옆집에 사는 고양이 나비와 루루에게는 현관 앞 자기 집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풍요의 행동을 여러 번 목격한지라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제 풍요는 우리 집에 오지 않는다.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사실을 그냥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풍요가 스스로를 없는 듯, 있는 듯 긴 시간 동안 우리 앞에서 그 존재감을 오묘한 몽롱함으로 흐려 놓은 탓인지도 모른다. 녀석과의 여러 해에 걸친 우정도 세월과 함께, 섭리와 함께, 그렇게 스르륵 녹여지는 것인지.
대신 어릴 적 풍요의 습성을 그대로 이은듯한 그의 아들이 풍요인 듯이 우리 집 마당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가까이 가면 손 살같이 도망가는 모양새나, 순하고 어리숙한 눈매나, 가급적 사람의 접근을 피하려는 사귐성 없는 태도나, 모든 것이 제 아빠를 빼닮았다.
하기야 배고플 때 우리를 쳐다보고 “야옹.” 하기만 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풍요는 그렇게 하고도 우리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온 천지를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오늘도 풍요를 보지 못했다.
풍요는 우리 집과 우리 식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도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오늘은 풍요 아들 우다를 보았다.
우다는 우리 집과 우리 식구라는 테두리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온 천지를 제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덩달아 나도 풍요로부터도 자유롭고 우다로부터도 자유롭다.
담장에 줄지어 핀 노란 수세미 꽃이 참으로 사랑스러운 날이다.
수세미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