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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정필 Sep 25. 2023

발가락이 닮았다.

출처:네이버 이미지

 “엄마, 발가락이 너무 아파”

딸아이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얼굴을 찌푸린다. 양말을 벗겨 보니 왼쪽 엄지발가락이 빨갛게 부었고 열감이 있다. 내성발톱처럼 엄지발톱 끝부분에 염증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염증 상태의 심각성을 보려고 면봉으로 발가락을 눌렀다. "아야, 엄마 아프단 말야. 살살 좀 해" 딸아이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내뱉는다. 그리고는 "아휴 통통한 발가락은 아빠를 담고, 하늘로 쳐다보는 발톱은 엄마를 닮고. 왜 나에게 이런 나쁜 것만 물려 준거야"하며 불만을  드러낸다. 나는 자주 듣는 이야기에 무심한 듯 상처 부위를 살핀다. 발톱과 발가락 사이에 노란  '농양'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익숙하게 면봉으로 상처부위를 살살 눌러가며, 농양을 밖으로 빼내고 소독했다. 그리고 하룻밤 지켜본 후 병원을 가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여유 있게 행동하는 이유는 딸아이의 발가락 염증은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발가락은 길고 앙상하다. 하지만 발톱이 하늘로 치켜들고 있어 발톱 깎기가 만만치 않다. 조심해서 깎아도 발톱 밑 여린 살에 잦은 생채기를 내며, 양말마다 구멍도 숭숭 뚫는다. 내 어릴 적 엄마는 밤마다 양말바느질을 하셨는데, 이 또한 ‘유전의 힘’인걸 하셨는지 묵묵하게 여덟 자식 양말을 기우셨다. 그런데 왜 하필 딸아이가 내 발톱을 닮았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아이는 나보다 환경이 더 좋지 않다. 통통한 발가락에 발톱은  하늘로 치켜들고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딸아이 발톱 깎기는 고난도 기술을 요했다.

이렇게 억울한 딸아이의 ‘통통 발가락’은 남편을 닮았다. 남편의 발은 작으면서 통통하고, 볼까지 넓어 멋스러운 스니커즈 신발은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남편은 자신의 신체를 탓하는 말로  “요런 손과 발이 복이 많다. 그래서 일복도 많다.”라고 말한다. 하필 이런 남편의 손과 발을 딸아이가 물려받았다. 

    


 딸아이를 임신하고 만삭이 되었을 때, 의사 선생님은 출산 시 저체중일 확률이 높다고 하셨다. 하지만 딸아이는 2.6kg로 태어나서 인큐베이터를 거치지 않고 내 품 안에 안겼다.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 가렴한 얼굴과 이목구비는 모두 나를 닮았다고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백일이 지나자, 허벅지는 꿀 벅지가 되어가고, 손과 발이 통통해지며 점점 남편의 체형을 닮아갔다.     


 몇 해 전,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학교를 다녀온 딸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기 손등을 꼬집으며 “엄마, 나는 이 손과 발이 너무 미워. 왜 이렇게 통통한 거야. 나도 긴 손가락 갖고 싶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나는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했고, 마땅하게 위로할 말이 찾지 못했다. 한참 후,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래도 귀엽잖아. 나중에 네일 하면 이쁠 거야.”였다. 하지만 사춘기 들어선 딸아이에게는 영혼 없는 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통통한 손가락이 얄미워’라는 계속 손을 꼬집었다. 그리고 원망을 한 층 더 높여 “왜 나는 여자인데, 엄마가 아닌 아빠를 닮은 거야”라며 억울해했다.     


 유전의 힘은 음식에도 나타난다. 아들과 나는 매운 것을 못 먹는다. 그리고 비계보다 살코기를 좋아하고, 바짝 익힌 삼겹살만 먹는다. 물컹한 비계는 목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과 딸은 고기의 비계와 닭 껍질을 좋아하며 얼큰하고 매운 것을 즐긴다. 나와 아들에게 매운맛이 남편과 딸에게는 밋밋한 맛이라서, 집에서 요리를 할 때면  ‘땡초를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매번 고민을 하게 된다. 결국, 일은 좀 많지만 아들과 내 것은 다른 냄비에 덜어놓고, 남은 찌개에 땡초와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남편과 딸에게 준다. 그러면 둘은 흐뭇한 얼굴로 제대로 맛을 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리고 유전은 씻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욕실에서 나와 아들은 천천히 꼼꼼하게 씻는데, 남편과 딸은 금방 씻고 나온다. 아들과 나는 “제대로 씻었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딸과 남편은 “여기가 목욕탕이야. 대충 씻고 나오면 되지”라며 불만을 표출한다. 그렇게 우리는 ‘물려받은 것으로’ 편을 나눠서 서로를 공격한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딸아이 발가락의 염증이 빠졌는지 덜 아프다고 했다. 병원 가는 것이 두려운 건지, 정말 아프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외관상 부기와 열감이 빠져서 병원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몇칠을 치료하니 발가락 염증은 사라지고. 건강한 발가락으로 돌아왔다. 딸아이는 아프지 않은 것에 만족했는지, 한동안 통통한 손과 발가락을 미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잔뜩 찌푸린 얼굴로 “왜 내 손과 발톱은 이렇게 생긴 거야. 왜 이렇게 이쁘지 않은 것만 물려 준거야 ”라며 억울해할 것이다.     


그런데 딸아 그거 알고 있니?

엄마도 외할아버지로부터 큰 키를 이어받지 못했고, 외할머니로부터 넓은 포용심을 다 이어받지 못했단다. 그것이 억울해서 엄마는 너를 임신했을 때, 우리 딸이 좋은 것만 가지고 태어나기를 바랐단다.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더구나. 특히 유전은 선택이 아니라 주시는 대로 무조건 받는 거였어.

그리고 엄마가 세상을 살다 보니, 이렇게 건강하게 낳아서, 잘 키워주신 부모님이 요즘에는 마냥 고맙게 느껴진다. 그분들이 계셔서 이렇게 너를 만날 수 있었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우리 딸이 엄마 나이쯤 되면 알 수 있겠지. 그때까지 엄마가 기다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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