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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학 May 28. 2023

도서관 3

청소를 끝내자 선생님은 도서관을 한바퀴 돌며 검사를 했다. 지우를 불러 먼지가 덜 닦인 창틀을 보여주며 지적했다.
 “어차피 더러워질텐데 개학 직전에 다시 닦으면 안돼요?” 지우가 투덜댔다.
 “너 어차피 점심 먹을건데 오늘 아침은 왜 먹었니?”
 “저 오늘 아침 안먹었는데요?”
 “…너 봉사 활동하러 온 것 아니었니?”
 알루미늄 창과 플라스틱 방패가 투닥대는 모습의 대화였다. 잠시 차가운 침묵이 흘렀고 결국 방패가 항복했다. 다시 걸레를 빨으러 가는 지우를 도와주려고 따라 갔는데 신경질을 내며 가서 ‘나는 걸레질할테니까 너는 가서 책벌레질이나 해 이 책벌레야’라는 말을 내게 쏘아붙였다. 의도했는지 모를 말장난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나오려했지만 참아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세수를 하였다. 머리와 어깨에 앉은 얇은 책먼지들도 털어내었다. 냉담한 분위기의 도서관에 돌아가기가 머뭇거려져 세수를 여러번 더 하며 시간을 끌었다.
 지우가 자투리 청소를 마치자 열두시 십오분 전이었다. 선생님은 수고했다며 우리에게 오늘은 돌아가라고 했다. 책을 읽다 갈까 고민하다 지우 눈치를 살폈다. 지우는 바로 집에 가는 듯했다. 배도 고팠기 때문에 나도 그냥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집이 먼 지우가 어떻게 갈 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너 혼자 했으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선생님도 참 양심 없다“     

“나 혼자였으면 책 옮기는 것정도는 도와주시지 않았을까?”

“도와주긴 뭘 도와줘! 계속 앉아만 있더만. 걸레를 하도 빨았더니 날이 이렇게 더운데도 손이 시리다. 근데 너도 느끼지 않아? 선생님이 나 싫어하는 것 맞지? 아까 창틀도 괜히 트집 잡은 거야”

확실히 선생님은 나보다 지우에게 덜 상냥했다. 하지만 지우의 태도도 나보다는 덜 예의가 있었다. 본인 때문일까. 나 때문일까. 덜 상냥함이 내 탓일 가능성을 두고 지우의 편에 서서 선생님의 뒷담화를 해만 했다.

“그런 것 같아. 아까도 억울했겠다. 그리고 내가 책 좋아하니까 봉사가 재밌을 거라 하셨는데 그거랑 전혀 상관 없이 힘들더라”

지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끄덕였다.


“근데 나한테도 최근까지 친절하게 말 걸어주신 적 없어. 학기 중에 매주 도서관에 가도 관심도 안주셨고 점심 시간 늦게까지 기다려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었어. 너도 자주 보다 보면 좀 나아질거야. 원래 처음엔 쌀쌀맞게 대하시는 분 같아”

“너 은근히 선생님 편 드네? 그래, 나도 너처럼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어. 아까는 짜증내서 미안해…근데 너 보기보다 위로를 꽤 잘한다.”

지우의 갑작스런 사과와 칭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제 전환을 위해 되물었다.

“아냐! 근데 너 집에 어떻게 가? 이 시간엔 엄마가 데리러 못 오실 거 아냐”

“응 버스타고 가려고. 도서관에 남아서 기다리려 했는데 기분 상해서 못 있겠어. 한시간 넘게 걸리는데 집에 언제 가냐. 아 배고파. 야 분식집 갈래?”

그렇게 지난번에 못 사줬던 떡볶이를 사줬다. 연초에 대학생 사촌 형이 이성 관계에 관한 겉멋들은 충고를 해주며 대한민국에 떡볶이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고 얘기해줬다. 지우는 내 앞에서 그것을 증명했다.


떡볶이를 먹으며 지우가 내게 물었다.
 
 “너는 책을 왜 그렇게 좋아해?”
 
 “재밌잖아”
 
“정말? 네가 저번에 읽던 적과 흑 읽어봤는데 재미없고 어렵던데.”

내가 읽던 책을 읽으려고 시도해봤구나. 지우 성격상 순전히 궁금해서 읽어봤겠지만 나와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의도가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내가 많이 아는 주제에 대해 얘기하려니 흥분되어 말이 빨라졌다.

“나도 그 책은 어려웠어. 많이 읽다보니까 이것저것 다 읽어보게 되더라. 재미있을지 없을지는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재밌어. 최근엔 외국 고전만 읽었는데 엄청 옛날 소설이 지금 읽어도 이해가 된다는 게 신기해 ”

“되게 어렵네. 너 중학교 일학년 맞아? 중학교도 유급이 있나…근데 아까 태백산맥은 왜 숨겨놓은거야?”

“봤구나”

“응, 굳이 그 한 권만 빼서 반대편에 꽂아 넣더만.”

“태백산맥은 길어서 읽다가 말았는데 버려진다고 생각하니까 아까워서 남겨두고 읽어보고 싶었어. 새 책이 들어온다는 걸 알았다면 안그랬겠지.”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근데 굳이 한 권만 빼놔?”

“2부 2권을 읽다 말았어”

“그렇구나. 새 책 오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표현이 적나라한 태백산맥을 읽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이 됐지만 어차피 1부도 못 끝내고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지우는 내가 시도한 도둑질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해서 마음이 놓였다. 신경쓰지 않은 이유가 곧 밝혀졌다.

“사실 나도 아까 청소하다가 이걸 주워서 몰래 챙겨놨거든.”

지우가 가방 앞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보여주었다. 열쇠 위에 붙어있는 허름한 견출지에는 손글씨로 ‘도서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창문 틈 사이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예비 열쇠같아. 선생님도 잃어버렸나봐”

“엄마는 내가 다음주에도 도서관 봉사하는 줄 알아. 아침에 엄마한테 태워다달라 한 다음에 도서관에서 놀거야. 방학이라고 사촌동생들이 집에 놀러와 있는데 차라리 도서관에서 쉬는 게 나을 지경이야. 다음주에 선생님 없을 때 문 따고 들어가 있어야지. 너도 와. 우린 공범이야.”

열쇠 도둑질에 비하면 버릴 책 한 권 훔치는 것은 새발의 피였다. 열쇠를 훔친 사실을 알게됨으로써 나는 자연스레 공범으로 묶였다. 그 다음주엔 나도 사촌형 집에 놀러가기로 했기때문에 어차피 도서관에 갈 수 없었다.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게 되었지만 나의 죄가 더 가벼웠다. 화제를 돌려 지우가 말을 이어나갔다.

“재밌는 책 추천 좀 해주라. 안어렵고 재밌는데 도움되는 책”
“나 최근에 그리스 로마 신화 읽고 있는데 수요일에 반납할테니까 읽어봐.”
“만화책? 그거 나도 읽었어”
“만화책말고 어떤 그리스에 미친 사람…이 정리해서 쓴 책 있는데 만화책 읽어봤으면 더 재밌을 거야.”


“그럼 오늘 빌려주면 안돼? 시간도 많은데 너네 집에 들리자.”
 
지우는 기어이 우리집까지 따라왔다. 집 앞에 잠시 기다리게한 후 책만 꺼내와서 건네줄 생각이었다. 문제는 아파트 입구에서 엄마를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엄마 또한 기어이 지우를 집안까지 들여 과일을 먹고 쉬다가게 했다. 넉살 좋은 지우는 내 방 침대에 누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 재미없다고 투덜대면서도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겼고 작가가 ‘그리스에 미친 사람’이라는 것에 동감했다. 1권을 다 읽었다며 패대기치고는 내 책상을 뒤적거렸다. 내 방학숙제를 검사하고 내 방에 있는 물건, 초등학교 졸업 앨범 따위를 구경하다가 네시 반이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그리스 로마 신화 2권도 챙겨갔다. 3권은 내가 읽던 중이었다.

3권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신화를 읽는 독자의 태도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얘기한다.
 
‘그리스의 신전을 드나들면서 나는 내 마음 속에도 신전을 하나 들여앉힌다. 이 신전은 나의 마음에 들여앉힌 것인 만큼 독자들은 여기에 들어와 절하지 않아도 좋다. 독자들 마음에 이런 신전을 하나 들여앉힌다면 더욱 좋은 일일 터이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 드나들며 내 마음 속에 도서관을 하나 들여앉혀왔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책장을 정리해왔다. 지우가 집에 다녀간 후, 내 마음 속 도서관 책장엔 지우처럼 열쇠를 훔치고, 처음 가는 친구 집에서 과일을 얻어 먹고 갈 수 있는 뻔뻔함이라는 제목의 책이 한 권 꽂혔다. 지우 마음 속에도 자신만의 도서관이 하나 개장했다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적과 흑을 꺼내보았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빌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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