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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학 Dec 14. 2022

눈에 덮인 추억과 기억 (영화 러브 레터)

Remedios - A Winter Story

12월이 되면 나는 영화 러브 레터 OST 앨범을 듣기 시작한다. 다른 노래들도 듣지만 정말 이 앨범은 겨울 내내 주구장창 듣는다.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절대로 듣지 않는 강박이 있을 정도다. 이 사운드트랙들을 들을 때 비로소 겨울이 왔음을 느끼는데 어떤 의미로는 나에게는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운전하며 듣는 것을 즐긴다. 겨울엔 밖이 추워서 운전할 일이 많아지기도 하고.

2013년에 리마스터링되어 발매된 러브 레터 OST  CD 앨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단연코 러브레터라고 대답한다. 러브레터는 겨울과 눈을 배경으로 현재와 과거, 1인 2역 인물의 시점을 오가며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떠나간 한 남자를 두고 추억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지만 다방면에서 분석해 볼 여지가 있는 짜임새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멀어지는 우리는 새로운 시간 앞에서 어떤 태도로 기억을 대하는가. 12월에 이 작품과 OST를 감상하다 보면 지나간 시간들 그리고 올 한 해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생각해보게 된다.

러브 레터는 추워서 싫어하는 겨울을 그나마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마음 한편에 난로를 피워주는 든든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이 주는 특유의 겨울 감성을 떠올리며 개인적인 감상문을 써보고자 한다. 사운드트랙과 함께.


러브 레터 OST 바로가기: https://youtu.be/1q-8xgX9ld


영화 러브 레터 줄거리

산악 사고로 죽은 애인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한 와타나베 히로코는 우연히 그의 중학시절 주소를 찾아내 편지를 써보내고 뜻밖의 답장을 받게 된다. 답장을 보낸 사람은 공교롭게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 이츠키의 중학교 동창,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다.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으며 떠나간 그를 추억한다.




1번 트랙 His Smile

이츠키의 3주년 추모식에 가기 전 히로코는 눈 위에 누워서 숨을 참고 있다. 가쁘게 숨을 내쉬고는 일어나 눈을 털고 눈 위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His Smile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이츠키는 설산을 등반하다 조난 사고로 사망했다. 히로코는 눈 위에서 숨을 참으며 이츠키가 죽어갈 때의 기분을 느끼려고 한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 걸어가는 설원에는 자국이 남는다. 이츠키도 히로코 마음에 아직 큰 흔적으로 남아 있다.

추모식은 죽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서 하는 행사다. 잊히지 않았고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망자에게 전달하는 셈이다. 제목은 His Smile (그의 미소)인데 이 곡의 분위기는 무겁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의 밝은 미소는 떠올릴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요절한 아들의 추모식에서 이츠키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판을 버린다. 취한 아버지의 친구는 히로코에게 추태를 부리고 만다. 일본의 장례와 추모 문화가 정확히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행사에 술이 빠지지 않는 것에 큰 동질감을 느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츠키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데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 때문에 작품이 어두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술판 장면 같은 코미디를 도입부에 넣었다고 생각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작품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고 관람객들에게 통보하는 것만 같다. 작품 내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새하얗고 밝은 눈이 이를 방증한다.     



4번 트랙 Letter Of No Return

여자 이츠키가 사는 동네를 비추며 흘러나온다. 영문 모를 편지에는 '후지이 이츠키 님. 잘 지내셨어요? 전 잘 지내요.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라고 적혀 있다. 히로코가 죽은 연인에게 답장을 기대하지 않고 쓴 편지다(Letter of No Return). 한차례 관현악이 흐르고 스트링 연주가 이어지는 곡이다. 평화로운 오타루 마을 풍경에 어울린다.

이츠키는 하루 종일 의아해하다가 결국 답장을 써버린다. '와타나베 히로코 님, 저도 잘 지내요. 감기 기운이 좀 있지만.‘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편지를 Letter of Return으로 만들어버린 셈이고 이 편지 한 통으로 히로코와 이츠키는 한 남자에 대해 추억하다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행사나 기념일이 있을 때 편지를 써서 자주 선물한다. (당장 얼마 전에도 송년회를 했는데 나는 편지를 써서 갔다.) 받는 사람들은 내용에 관계없이 대체로 무척 좋아해줘서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쓰는 이런 편지들도 Letter of No Return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 카드에 답장을 해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답장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담화가 시작된다. 이 영화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이 그렇다.



5번 트랙 Sweet Rumors & 9번 트랙 The Flight

히로코와 이츠키가 처음 영문 모를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에 Sweet Rumors가 삽입된다 히로코에게 답장은 참으로 달콤한 소문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이 아닐지 몰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들뜨게 하는 소문이 있다. 그런 들뜬 마음을 아키바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어떤 소문은 결코 사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츠키가 살아있다든지 말이다.

아키바는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목격했던 이츠키의 선배이다. 히로코는 아키바에게 편지 사건에 대해 실토한다. 들뜬 마음으로 천국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고 말하는 아키바는 이를 질투한다. 사실은 히로코를 좋아하고 있던 것. 이츠키가 죽은 후 본인들의 관계의 정체에 대해 추궁하던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기습 키스를 하고 이때 The Flight가 잔잔히 흘러나온다. 전체관람가인 이 작품에서 그나마 어른의 로맨스를 담고 있는 장면이다.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이츠키를 잊고 자유로워지라고 부탁한다. 이츠키를 치우고 히로코 마음 속을 자신으로 채우려는 걸까.

아키바가 히로코를 연모하고 죽은 이츠키를 질투하는 것은 틀림없이 사실이지만, 작품 내내 그는 진심으로 히로코 본인을 위해 그녀를 도와준다. 여자 이츠키를 찾아가 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도, 설원의 외침을 위해 히로코를 등 떠미는 것도 아키바다. 아궁이에 유리공예품을 굽는 아키바는 뜨거운 사랑을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극이 진행될수록 냉철한 태도로 사건을 대하고 차갑게 사랑에 다가간다. 그렇게 둘은 이츠키의 목숨을 앗아간 차가운 설산을 향해 여행을 나선다. 아키바의 관점에서 영화를 감상함으로써도 흥미로운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8번 트랙 Frozen Summer

여자 이츠키는 감기를 앓고 있다. 안일한 태도로 감기를 내버려 두자 어머니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는데 이유는 과거, 아버지가 악화된 감기로 발병한 폐렴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츠키를 어머니는 병원에 반강제로 내려주고 훌렁 떠나버린다.

이츠키는 병원 복도에서 호명을 기다리며 졸다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는 환영 속에서 응급실로 실려가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 아버지를 실은 병원 침대는 비어 보이기도 하며 수술실 문이 닫힌 후,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이츠키에게 호통을 친다. 이 장면에서 Frozen Summer가 흘러나오는데 혼란스러운 이츠키의 머릿속에 과거 남자 이츠키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츠키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잊고 살았던 중학 시절의 사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아버지의 죽음이고 하나는 남자 이츠키의 갑작스러운 전학이다. 여기서 사건을 잊었다는 것은 일어난 사건 자체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만 대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기억에 감정을 싣게 되면 추억이 된다. 이 두 사건을 추억으로 남기기 싫은 이츠키는 자기 방어의 기제로서 기억에서 감정을 분리해 객관적으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흐릿한 감정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영화의 클라이맥스 전까지, 이츠키가 아버지의 죽음(감기)과 남자 이츠키의 존재를 무덤덤한 태도로 대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려놓은 그때의 기억이 히로코의 편지와 아버지를 떠나보낸 병원 복도를 마주함으로써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선생님과 간호사가 이츠키의 이름을 부를 때, 남자 이츠키에 대한 기억이 여름날 햇살처럼 쏟아진다.

항상 좋은 생각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득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내가 관찰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매년 겨울, 이 영화를 감상하는 내가 지난 겨울의 내 모습을 떠올리 듯 말이다.



11번 트랙 A Winter Story

히로코는 이츠키의 집에 찾아가지만 이츠키는 부재중이다. 집 앞에서 이츠키를 기다리며 히로코는 편지를 쓴다. 영화의 주제곡 A Winter Story가 연주되기 시작한다.

히로코는 이츠키를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사과의 편지를 남긴 채 떠난다. 남자 이츠키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는다.

이 편지에 이츠키가 답장을 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 복도에서 남자 이츠키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답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히로코는 옛 연인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그의 중학교 동창인 여자 이츠키를 닮아서임을 깨닫고 상실감에 빠진 채 이야기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츠키는 답장을 한다. 남자 이츠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이 두 인물은 여기서부터 대비되기 시작한다. 히로코는 잊으려 하고 이츠키는 떠올리려 한다. 히로코는 과거를 밀어내고 이츠키는 과거를 당기고 있다. 둘은 성격도 반대되는 인물로 표현된다.

A Winter Story는 작품에 어울리는 훌륭한 주제곡이다. 기교를 뺀 서정적인 피아노 멜로디로 시작하여 관현악을 더해 후반부로 갈수록 템포가 빨라지며 현란해지는 구성을 지녔는데 마치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한껏 흩날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하나의 이야기(A Winter Story)가 한 인물을 다른 시간대에 알고 지낸 두 인물의 시점을 통해 각자의 이야기로 정립된다.



2번 트랙 Childhood Days

본격적으로 여자 이츠키가 과거 회상을 하며 남자 이츠키 이야기를 편지에 담기 시작할 때 흘러나오는 곡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인 만큼 제목도 Childhood Days (어린 시절). 경쾌한 멜로디로 벚꽃잎이 흩날리는 등굣길 풍경에 어울린다.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에 대해 기억나는 이야기를 알려달라 하자 여자 이츠키는 중학교 때 이름이 같아 생겼던 에피소드들 혹은 그와 엮였던 사건들을 여러 번의 편지에 걸쳐 써보낸다. 일본의 성씨는 우리나라와 성씨보다 다양하고 작명법도 달라서 우리나라보다는 동명이인이 적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외자 성에 이음절 이름을 붙이니 동명이인이 제법 많은 편이다. 후지이라는 성과 이츠키라는 이름이 일본에서는 얼마나 흔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츠키라는 이름은 남녀 혼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동명이인이라고 해서 호들갑 떠는 것은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같은 이름이 두 번 나온다. 첫날이라 쭈뼛대는 학생들에게 이만한 주목거리가 없을 것이다. 여자 이츠키가 과거를 회상할 때 흘러나오는 이 경쾌하고 설레는 곡은, 사소한 것으로도 웃어대던 어린 시절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억이 잊힌 것처럼 순수한 감정도 잊힌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와 3년 내내 같은 반을 하게 되었다는데 이 3년을 편지에는 괴로운 날들이라고 표현한다. 남자 이츠키와 그렇게 친하게 지낸 것 같지도 않고 서로 잘해보라고 놀려대는 친구들의 반응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실제로는 설렜던 마음을 아픈 기억 때문에 잊게 되고, 즐거웠던 추억들을 괴로운 날들이라고 담담하게 표현하는 듯했다.



12번 트랙 Eccentric Love Parade & 10번 트랙 He Loves You So

이름이 같아서 둘의 영어 시험지가 엇갈린 적이 있었다. 바꿔달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친 여자 이츠키는 방과 후 자전거 주차장에서 남자 이츠키를 기다리기로 한다. 당시 자전거 주차장은 학생들에게 이성 교제의 장이었다. 이츠키를 보며 남학우들은 '할 건 하네'라며 비아냥댄다. 의도야 어쨌건 이츠키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할 건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남자 이츠키가 나타난다. 둘은 뒤바뀐 시험지를 대조해보는데 그 와중에 남자 이츠키는 오답을 확인하며 그 자리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날은 어둡고 전등을 비추는 여자 이츠키의 팔은 아파오는데 남자 이츠키는 여유롭게 시험지 답을 맞추고 있다.

답을 맞추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와 그저 같이 있고 싶은 뿐이었다 (He Loves You So) 시험지는 다음날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니 여자 이츠키는 굳이 자전거 주차장에서 저녁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인물들이 특이한 방식으로 감정을 전한다(Eccentric Love Parade).



7번 트랙 Fading & 12번 트랙 Soil Of His Tears

두 명의 이츠키가 같이 부원으로 활동하는 도서부는 작품에서 인물들에게 결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설정이다. 아무도 빌리지 않는 책들의 도서 카드에 본인의 이름을 적는 장난, 동급생을 소개해주려는 여자 이츠키에게 뾰로통한 태도 등을 통해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를 좋아하고 있음을 모호하게 보여준다. 여자 이츠키의 감정 또한 모호하게 표현되는데 창가에 서서 책을 읽는 남자 이츠키의 모습이 여자 이츠키의 시점에서 후광과 함께 잠시 사라지는 장면 연출도(Fading) 인상적이다.  

부상을 당해 육상 대회에 나가지 못하게 된 남자 이츠키는 대회 당일에 레일을 뺏어 달리다가 넘어지는 사고를 친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 모습에 웃어대는 학우들. 여자 이츠키는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고도 못 본 척한다. 작품 내내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에게 사랑을 느끼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 이츠키는 이를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후광에 비친 남자 이츠키가 잠시 사라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연출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파고들어 표현할 용기가 없는 셈이다.

히로코의 부탁에 따라 운동장 사진을 찍으러 학교에 방문한 여자 이츠키는 우연히 옛 담임 선생님을 마주쳐 도서부 후배들을 만나게 된다. 후배들은 이츠키의 이름을 알고 있는데 전부 남자 이츠키가 도서 카드에 이름을 적는 장난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빌리지 않는 책들에 좋아하는 여자애의 이름을 적어 놓은 남자 이츠키의 마음을 여자 이츠키는 알 길이 없다. 숨겨져 있고, 외면하려는데 어떻게 맞닿을 수 있을까.

 


14번 트랙 Gateway to Heaven & 7번 트랙 Forgive Me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가 죽었음을 옛 담임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다. 이츠키는 학교를 떠나며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장례식 후 얼음에 갇혀 죽어 있는 잠자리를 발견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죽었음을 실감하는 이츠키. 시퀀스 내내  Gateway to Heaven이 흐른다. 천국으로의 문이 열리고 인물들을 뒤흔든다.

여자 이츠키의 감기는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고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가 죽은 설산 앞에서 결국 뒷걸음친다. 눈은 아름답지만 아버지와 남자 이츠키의 목숨을 앗아간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손녀를 살리기 위해 눈보라 속에 달려들고 히로코는 설산 앞에 마주한다.

안타깝게도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여자 이츠키가 감기 관리에 소홀하고 히로코가 남자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보라와 함께 다시 천국으로의 문이 열렸을 때, 이츠키와 히로코는 죽음에 당당히 맞서 선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극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늘 드리워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숙제와 같다. 밤새 내린 눈은 그치고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른다.

설원에서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장면에서 작품 전반적으로 절제되어 있던 감정이 폭발한다. 히로코의 외침을 병상에 누워있는 여자 이츠키가 메아리처럼 중얼거리며 교차한다. 히로코의 마음에서 비워진 남자 이츠키의 자리가 여자 이츠키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의 추억이 담긴 여자 이츠키의 편지를 모두 돌려보낸다. 추신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그가 쓴 이름들이 당신 이름인 것만 같군요 '


15번 트랙 Small Happiness

전학을 가기 전 남자 이츠키는 상 중인 여자 이츠키의 집에 들러 책을 반납해달라며 건넨다.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이 많이 흐른 봄날, 여자 이츠키는 이 책의 도서 카드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중학시절 모습을 발견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피아노로 잔잔히 시작되는 Small Happiness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며 관현악곡으로 전환되는데 은은하게 흩어져 있던 감정들이 햇살처럼 쏟아지는 기분을 들게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곱 권에 달하는 장대한 소설이다. 사실 나는 러브 레터 때문에 이 작품을 찾아 전권 읽어 보았다.(밀리의 서재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읽기 힘들었지만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는데 러브 레터가 이 소설을 강한 모티브로 채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며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는 긴 여정과 흘러간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영화 러브 레터는 훌륭하게 시각화했다.

마지막 권인 7권의 부제는 '되찾은 시간'이다. 도서실에 방치되어 오랜 시간 묵혀 있던 남자 이츠키의 도서 카드, 즉 '러브 레터'가 비로소 제 주인을 찾아가게 되는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아무도 빌리지 않는 책에 장난을 치는 설정이 이 장면에서 소소히 빛을 발하는데, 전권을 읽어보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정말 7권까지 도달하기 힘든 작품이다. 1권도 끝내기 힘든데 누가 7권까지 빌려볼 수 있을까. 소설이 갖고 있는 내외적인 특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흥미로운 영화적 장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따로 나중에 따로 서평을 써보고 싶다. 독서 체험의 왕중왕인 작품이다.


주고받은 편지와 각자의 여정을 통해 두 여자는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를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에 향한 감정을 되찾게 된다. 히로코가 놓아준 추억은 이제 순전히 이츠키의 것이다.

이츠키는 도서 카드 이야기를 편지에 담고도 부치지 못한다. 답장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답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끝맺음된다.  




러브 레터는 국내에 여러 번 재개봉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관람한 것은 2016년 1월이었고 이후에는 2013년 리마스터링 DRM버전을 구매해 다운로드하여 매년 보고 있다. 본문의 스크린샷은 직접 캡처한 것. 재개봉이 많이 되어서 새로 리마스터링 버전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아직 없는 듯하다. 현재 국내에서는 왓챠플레이 스트리밍 서비스로 밖에 볼 방법이 없는데 아마 2013년 버전일 듯하다.

영상미가 정말 좋은 영화다. 앞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언급했듯이 과거를 회상하는 이미지를 따뜻하게 화면에 잘 담아내고 있다. 추운 겨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이런 영상미 덕분에 군데군데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 감상문을 쓰기 위해 영화를 두 번 정도 다시 봤다. 올 겨울도 잘 지내봐야지.   




침대


침대에 누워 방문 밑으로 비친 거실의 램프를

바라보다 과거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지금 머릿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추억이라고 부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쫓아낸 적도, 쫓은 적도 없는, 일어난 일들


빛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정도의 밝기만큼

기억은 선명하여 쫓을 여지를 준다

잠에 들기 전까지 과거를 헤집는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침대에 누워 있는 자세가 어색해지고

내가 어느 방향으로 머리를 대고 누웠는지도 잊어버린다


그럴 땐, 눈을 살짝 떠, 방문 밑의 빛 한 모금을 머금어,

숨 참은 채 출발지로 돌아온다


침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모두의 출발지이자

목적지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작성했던 시. 작품 속 화자이자 작가인 마르셀은 망각된 기억과 잃어버린 시간은 창작 활동을 통해 되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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