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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와케이크 Jan 15. 2022

새해맞이의 추억

열광가운데의 고독

17년 12월 31일

 

 “오! 사! 삼! 이!”

 12월 31일이 끝나기 몇십 초 전, 예배당의 커다란 스크린에는 17년이 끝나기 몇 초 전의 시간들이 하나씩 카운트되고 있었고.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커다란 장소를 꽉 채울 정도의 큰 목소리로 17년의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카운트 다운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들뜨고 격앙된 분위기에 조금도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불만스럽게 턱을 괸 채로 속절없이 지나가는 저 17년의 마지막 시간들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새해맞이를 무척 싫어했다. 내게 새해맞이란 바뀌지 않는 삶의 반복에서 시작과 끝을 말하는, 일종의 조롱이나 마찬가지였다. 새해 역시 지루한 삶의 연장선 속에서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오늘과 같을 내일임을 장담할 수 있었기에 하루하루의 무게감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한 사람들이 그저 달력 숫자의 변화를 즐거워하고 몸의 노화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나로썬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배당은 앉을자리가 부족해 의자를 더 갖다 놓을 정도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같이 송년회마저 예배로 보내는 독실한 사람들이나, 예배에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고 온 간절한 사람들, 혹은 부모의 손에 이끌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아이들이 이곳에 가득한 탓이었다. 이들 모두 올해의 마지막을 종교행사로 보내면 내년에 믿음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가히 종교인다운 낙관을 하고 있었다.

 초읽기가 끝나자 스크린에는 Happy new year!이라는 글자가 띄워졌고 사람들은 그와 동시에 일제히 함성을 질러댔다. 나는 그 광기에 가까운 열정에 압도되어 그들 얼굴에 비친 설렘과 기쁨을 황망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집사님, 방금을 기점으로 또 늙으신 거예요.’
‘장로님, 제가 장담하건대 장로님의 1월 2일은 일주일 전과 똑같을 겁니다.’


 내가 가슴속으로 사소한 불만을 품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저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덕담을 나누며 기쁜 얼굴로 교제하고 있었다. 그저 달력 숫자만 바뀌는 새해에 왜들 저리 난리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새 달력을 받을 생각에 너무 기뻐서 저런가.

 18년의 열렬한 시작으로 예배가 끝났고, 의자에 앉은 인파들은 여전히 방금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표정으로 예배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분위기에 질려 황급히 인파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곳에서 도망쳐 나가려고 했다. 어서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내겐 다른 심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배당 홀을 빠져나온 나는 예배당의 문 앞에 서서 그 주위를 정처 없이 떠돌며, 문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눈으로 일일이 넘기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오는 몇몇 아는 이들이 웃는 얼굴로 내게 새해 인사를 건네곤 했지만, 나는 그들 얼굴에 깃든 행복한 새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건성으로 인사를 받곤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의 여유가 너무도 부족한 탓이었다.

 지속된 긴장 상태 속에서, 인파를 따라 나오는 영이 누나와 훈이 형의(가명) 얼굴을 발견하자, 나는 놀라 튀어 오르는 심장을 뒤로한 채, 쭈뼛대며 그들의 시야 앞으로 다가갔고 곧 영이 누나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들까 망설이는 그 짧은 순간, 영이 누나는 나와 마주친 얼굴을 황급히 돌린 다음 내게서 도망치듯이 걸어 나갔다, 그때 누나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뭐랄까, 무언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을 때 그 장면을 눈에서 털어내고 싶다는 듯이 눈길을 피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누나가 내게 보여준 단호함에 크게 실망해서 예의상 손을 흔들어주는 훈이 형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등을 돌려 떠나는 그 두 사람의 형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나라고 새해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과열된 분위기에 휩쓸린다면 사이가 멀어진 누나와도 극적인 사과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이 있었다. 여러 기대와 걱정을 머리에 뒤섞으면서도 사과를 거절당하는 레퍼토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방금 그녀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다른 어떤 의사 표현보다도 더 확실한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어, 나는 감히 다른 해석의 여지를 붙일 수가 없었다.


 실망감이 마음속에서 겹겹이 쌓이자 금방 피로를 동반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 허탈감 속에서 초점을 잃은 두 눈 바깥으로 도대체 뭐가 그리 행복한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들이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비웃으면서 하나씩 지나가는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극적인 관계 회복을 머릿속에서 그려내고 있던 나 자신이 순진해 보이는 것을 넘어, 이제는 병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방금보다 더욱 고립되고 쓸쓸한 마음으로 새해를 저주하며, 교회 밖을 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집으로 가는 큰길에 들어서고 고요한 정적이 두 귀를 감싸고돌자, 단 몇 분 전 열렬한 분위기가 거짓말 같게 고요해졌고, 단 몇 분 전 기대가 우스울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나는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광하는 새해라면 오늘만큼은 나를 찾는 사람, 나를 부르는 사람이 생기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와 화해도 없었다면 이 정도 이벤트는 기대의 축에도 못 끼는 것 아닌가. 하지만 거리에는 어지러이 비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실망감에 몇 걸음을 더 걷다가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없는 짙은 어둠만 도로 저변에 깔려있었다. 나는 깊게 한숨 쉬었다. 해소될 길 없어 보이는 마음속의 짐을 극적인 해소 없이 오롯이 내 힘으로 견뎌야 하는 곳, 딱 내가 예측 가능한 정도의 일만이 벌어지는 곳, 나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불렀다.


 현실의 난관을 극적인 상황으로만 타개하기를 기대하는 건 오히려 현실에 대한 반감만 키우는 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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