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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와케이크 Feb 25. 2022

친했던 누나와의 추억(결)

 사실 그 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누나와의 관계에 회복조차 불가능 할 것이라고 여겼다. 누나와의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져 버렸고, 어쩌다 갈등이 봉합되었다 한들, 모든 치료가 회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듯이 누나에게 남은 흉터는 우리 관계에 남아 계속해서 쓰라릴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몇일 전만 해도 너무 새삼스러워서 아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던 토끼누나의 손편지 이야기까지 고려하게 된 건, 내가 망가뜨린 일의 뒷수습을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기껏 나를 생각해줘서 진지하게 상담까지 해주었던 토끼 누나의 정성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서, 나는 최소한 '노력이라도 했다' 라는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다이소에서 귀여운 편지지를 사서, 책상 앞에 서서 글자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시켰던 편지 쓰기 이후로 이렇게나 진심으로 편지 쓰기에 몰두한 것은 오랜만이어서, 나는 서투른 손놀림으로 쓴 내 감정을 눈으로 목도하며, 낯간지러움에 여러번 펜을 놓다 주웠다를 반복하곤 했었다. 하지만 편지를 적는 것보다 어려웠던 건 내 눈에 족할 만큼의 검수과정을 거치는 일이었다. 처음엔 내 사연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했던 이유를 적을까 싶었지만, 길게 늘어진 글자들이 구구절절한 변명처럼 느껴졌고 글을 축약해 사과하나만 달랑 적어놓으려니, 이유없이 혼자 화내고 혼자 사과하는 것처럼 보여, 내가 너무나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질것 같았다.

 결국 그 편지지에 샤프 자국이 남을 정도로 수차례에 걸친 지우개질을 반복한 끝에 나는 편지를 다 적을 수 있었지만, 누나의 그 원망스런 얼굴이 아직도 아른하게 남았던 나는 도저히 누나의 얼굴을 맞대고 편지를 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알고 지내던 누나의 친구에게 부탁해 편지를 전달할 것을 요청했다. 누나의 친구는 그날 내가 누나와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후로, 나와 누나사이의 갈등을 간접적으로 목격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주는 편지가 어떤 의미였는지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굳이 내게 이 편지가 뭔지 물어봄으로써 그 사실을 모른척 해주는 듯 했다.

 그 후, 누나에게서,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을 듣길 원했던 나는 몇 일, 몇 주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했다. 나는 차라리 누나가, 이게 뭐냐며 이런 걸로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았냐며, 내게 원망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누나는 조용했다. 편지를 아예 안받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시간의 흐름과 기다림이 평행선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누나의 무반응이 일종의 대답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라는 의미의 완곡한 표현으로써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총대를 메준 것뿐이지, 누나의 그 표현은 사실 본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렇게 심란했던 17년도와 그 해의 마지막을 무의미하게 끝내는 새해맞이를 보내고 나서, 나는 18년도에 입대하게 되었다. 물론 입대하게 되었다고해서 내가 망가뜨린 것들이 내 이별을 앞두고 돌아와 나를 눈물로 맞이해주는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그런걸 바란적도 없었지만 입대라는 건 으레, 지겹게 맞닥뜨려온 일상에도 지금껏 느껴본적 없던 애정을 안겨주는 것이라서, 나는 당연하게 생각해온 내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에게도 한없는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그 대상 중에는 당연히 누나도 포함되어 있어서 입대를 한 후, 훈련소 5주 동안은 내가 한 행동들과 그로 인해 초래된 일들에 대해 후회를 많이 했었다. 내가 진정으로 신경썼어야 했던 것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대비보다 당장 내게 주어진 것들을 과분하다고 느낄 필요도 없이 그대로 즐기는 것이었다. 난 내게 일어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는데 성공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그 과보호로 인해 분명히 잃은 것은 있었다.

 성숙인지, 미련인지, 나는 19년도에 휴가를 나와, 누나에게 가서 다시 사과를 하게 되었다. 교회에 있는 누나에게, 주차장에 찾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하여 누나를 따로 불러냈고 주차장에 가서 찾는 사람이 어딨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누나에게, '제가 찾았어요' 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너 진짜 드라마틱하다며' 오랜만에 까르르 웃는 누나에게 그 재치와 적극성은 누나가 처음 내게 다가와 주었을때 얻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얘기를 안한지 너무 오래되서 어디서 부터 말을 해야할 지 잘 모르겠는데 저한테 잘 대해줬던거 너무 고맙고 그래서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어도 진작 했어야 하는 이야기를 너무 늦게 한것 같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누나 역시 묘하게 떠오르는 쓰라림을 느끼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여러 얘기를 했었다. 본인도 누나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전에 내가 시도했던 여러 사과의 노력들도 흘려보내진 않았지만 그때는 나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그래서 여태껏 얘기를 걸 구실이 없었지만 내가 먼저 말을 꺼내준 것에 너무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이 정도로 부드러운 반응은 내겐 조금 예상외였다. 갈등을 과장해서 보는 내 시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한 찔림이 있었던 것인지, 나는 누나에게 대화를 시도했을 때 '아니, 난 너랑 할 얘기 없는데?' 같은 말로 문전 박대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나는 문전박대는 커녕, 왜 지금껏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부드러운 반응을 보여주었었다. 그걸 생각해보면 지금껏 내가 들여왔던 화해의 시도들과 전달된 편지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바짝 긴장해있던 몸이 녹는듯한 따스한 기분에 젖은 나는 누나에게 한번 안아달라고 했다. 누나는 그런 나를 안고는 한 손으론 등을 두드려주었다. 머리에선 좋은 향이 나고, 한 번도 안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폭 안았는데도 미세한 두근거림도, 스킨십이라는 의식도 없이, 마치 엄마를 안았을 때처럼 무덤덤하면서도 몹시 포근한 느낌에, 누나를 만나고나선 한 번도 잔떨림이 멈추지 않았던 내 마음의 물결이 서서히 잦아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세상 따스한 포옹을 마지막으로 누나와의 기억을 봉인해놨던 내게, 가을 바람을 타고 날아온 누나의 결혼 소식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한 땐 가까웠고 또 다툴 만큼의 애정도 있었던 누나의 소식을 오랜만에듣게 되어 반갑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본지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도, 감정선도 모두 옅어진 지금에 있어선 누나의 경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청첩장은 커녕, 결혼 소식조차 친구의 입을 통해 알게된 나로썬 참석 여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앞서나간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간만에 들려온 누나의 소식 덕분에, 아련한 기운에 잠길 수 있었다.

 생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이렇게 열렬히 가까워지고, 다투며, 화해했던 다채로운 기억들은, 무채색으로 뒤덮인 내 세상에 사람만이 그 색깔을 덮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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