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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Jan 05. 2024

슬픔의 다른 방식

남은 사람과 남은 고양이

꼭 혹독한 계절을 잘 넘겼다 싶으면 동네 고양이들은 세상을 떠나곤 했다. 올해도 지독한 더위를 힘겹게 견디던 몇몇 고양이들이 선선한 날씨를 얼마 누리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났다. 여름에 너무 많은 기력을 소진한 탓이었을까. 주변의 죽음을 겪은 뒤 남은 자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은 회상하고 의미 붙이기다. 동네 사람들과 떠나간 고양이들을 추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이야기한다. 적어도 사체를 수습해 줄 수 있어서, 추운 겨울을 또 겪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잘된 일이냐고. 동네 고양이들의 죽음은 내게 슬픔과 안도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애착의 대상을 잃어 슬프지만, 어쩔 수 없이 얘도 나도 고생 끝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온다. 긴 퀘스트를 끝낸 것 같은 안도는 길 위의 삶이 말할 수 없이 고단한 탓이다.


아파트 입구 화단에 늘 수건처럼 구겨져 있던 하얗고 꼬질꼬질한 고양이를, 지나가던 주민들은 꼭 짠한 표정으로 돌아보곤 했다. 시리는 언제나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내가 처음 시리를 봤던 3~4년 전부터 동네 사람들은 쟤 참 오래 살았다고 했으니 열 살은 거뜬히 넘은 것으로 추정되었고, 근처 주택에서 나온 유기묘였다. 동네 고양이에게 장수는 축복이 아니다. 동네 터줏대감은 장수한 만큼 고생도 꽤나 길었다. 사는 동안 정권이 두 번 바뀐 셈인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묘생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보면 시리가 아무리 노쇠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된다. 시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시리를 포함해 대여섯 마리가 우르르 몰려다녔는데 하나 둘 떠나더니 최근에는 세 마리만 남았다. 그중에서도 고등어 무늬의 수컷 고양이 메롱이와는 꼭 붙어 다녔는데, 둘 사이가 어찌나 좋은지 눈만 마주치면 머리를 비비곤 했다. 둘이 함께 의지하는 길 위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고, 가끔은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시리는 야위어가더니 이윽고 휘청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하루는 스티로폼 집 안에서 꼼짝도 않더니, 다음날 몸을 늘어뜨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곁에는 메롱이가 앉아있었다. 메롱이는 여느 때처럼 시리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원래도 시리를 지켜주는 쪽은 메롱이었다. 다른 수컷 고양이의 위협이 있을 때면 다리가 불편한 시리 대신 메롱이가 나서곤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몸으로 용감하게도 앞장서서 다른 고양이를 쫓아냈다.


고양이 초상을 여러 번 치르다 보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처럼 '산 고양이는 살아야지'의 뜻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온통 현실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치우는 움직임뿐이다. 죽은 고양이가 지내던 박스와 담요를 빠르게 치우고, 다른 고양이들이 지낼 수 있도록 자리를 정리한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죽었다는 것은 다른 한 마리의 고양이를 더 돌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여유를 뜻했다. 고양이의 돌봄과 죽음은 늘 이런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남은 고양이는? 동물이 겪는 슬픔에 관해 다룬 책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에서 바버라 J. 킹은 동반자를 잃고 애도하는 다양한 동물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죽은 가모장의 뼈를 어루만지는 코끼리부터 동료의 무덤을 원형으로 둘러싼 말들, 죽은 새끼를 안고 다니는 원숭이까지. 이들은 놀라운 방식으로 각자의 슬픔을 드러낸다.


얼마 전 동네 주민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리가 떠난 날 오후, 메롱이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뭔갈 찾는 듯 샅샅이 살피더라고 했다. 그리고 웬일인지 메롱이는 평소 가지 않던 구석진 곳에서 한동안 숨어 있었다. 킹에 따르면 비인간 동물의 슬픔은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고 개체마다 달라 일반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메롱이의 행동이 우연인지 슬픔의 징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닭의 슬픔은 염소의 슬픔이 아니다. 닭의 슬픔은 침팬지의 슬픔도 아니며, 코끼리의 슬픔도, 인간의 슬픔도 아니다.’라는 킹의 문장을 읽으며 슬픔의 정의를 확장시키게 된다. 내가 모르는, 다른 방식의 슬픔을 상상한다. 가령 메롱이와 시리는 겨울이면 상자가 얼마나 조그맣든 간에 함께 구겨지듯 꼭 붙어 체온을 나누곤 했다. 그러니 쌀쌀한 날 온기 나눌 이 없이 홀로 남겨졌을 때 메롱이가 느낄 추위는 슬픔의 다른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남은 고양이들을 보살피느라 바삐 움직일 때, 걔네들을 보며 쉽게 웃을 때 나는 내가 너무 안 슬퍼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이 다행스럽다'라고 썼을 때는 내가 몹쓸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킹의 문장을 내 식대로 쓰자면 이렇다. '길고양이를 잃은 슬픔은 반려 동물을 잃은 슬픔이 아니다' 길고양이와 반려견을 동시에 돌보는 나로서는 두 개의 슬픔은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남은 고양이들을 살펴야 하는 숙명 때문이다. 떠난 고양이들을 금세 잊은 것이 아니라 슬픔의 다른 방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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