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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Oct 24. 2023

이별의 모양

길고양이 아니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 지니를 보내며

고속도로를 세 시간 넘게 달려 깊은 산골에 도착하자마자 지니의 몸이 굳어가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여름휴가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날 아침 출발하기 전, 지하 계단 아래에서 곤히 잠든 지니에게 돌아올 때까지만 꼭 버텨 달라고 말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내 손은 지니의 사진을 여러 각도로 계속 찍고 있었다. 내 몸이 마지막 순간을 직감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니는 얼마간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힘이 빠져 비틀비틀 걷는 모습 하며, 식사량은 물론 음수량도 급격히 줄었다. 얼마 전 자리에 오줌을 지리고 맨바닥에서 어쩔 줄 모르는 지니를 안아 들고 얼굴을 묻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쩌면 너무 오랜 시간을 나쁜 예감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무뎌졌던 것이다. 점점 쪼그라드는 몸으로도 무려 일곱 번의 계절을 넘겼으니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지니는 꽤 오래전부터 동네를 떠돌아다녔다. 새끼들은 모두 구조되어 입양 갔지만 지니는 홀로 길에 남겨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구내염 때문에 음식을 잘 먹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시 꼬질꼬질한 털과 눈곱 때문에 좀비캣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는데, 나는 좀비캣을 보다 못해 수술대에 올렸다. 그 후 병이 재발했지만 꾸준히 약을 복용하며 어찌어찌 버티는 중이었다. 죽은 듯 잠만 자다가도 내 발소리를 들으면 마중 나오고, 한동안 먹지 못하다가도 황탯국에 다시 입맛을 되찾았다. 그러니 어찌 한 번의 목숨이 더 남았다고 무작정 낙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니가 늙고 병들어가던 일곱 번의 계절을, 지켜봤다기보다는 '함께 했다'라고 기억한다. 음식을 권해도 아무런 반응 없는 지니와 실랑이하고, 약을 먹이려고 매일같이 한바탕 했으니 지니의 고통을 함께 하기로 한 공동체라 할 만했다. 지니가 알길 바랐다. 자신을 매일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걸 안다면 지니가 아홉 번의 목숨을 끝까지 다 써가며 기어코 살아남고 싶을 것 같았다. 반려동물과 교감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나친 의인화나 망상이 아니냐고 코웃음 치겠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동물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짐을 끄는 짐승들>의 수나우라 테일러는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 '동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라고 했다. 그들의 행위 자체가 곧 목소리인 셈이다.


작년에 수술받은 지니를 한동안 우리 집 베란다에서 회복시키고 다시 살던 곳에 방사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지니는 내가 귀가할 때면 우리 집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오는 행동을 며칠 동안이나 반복했다. 경쟁자도 없고 조용한 실내 생활이 그리웠던 거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지니에 대한 애틋함과 나에 대한 지니의 신뢰 같은, 우리만의 유대가 생겨났다. 그러니 매일 8시에 약속된 나와의 만남이 지니에게 기다림이 되고 끈이 되었으면 바람이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게 딱 길고양이만큼 사랑하기란 없었다. 지니는 내게 길고양이 중 하나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개별 존재였다.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장례’

지니는 오랜 시간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분의 보살핌 아래 영영 잠들었고, 마지막 인사에 응답하려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고 했다. 소식을 전해 들으며 걸리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저녁 8시부터 지니가 나를 기다렸을 거란 것, 그리고 내 손으로 마지막 배웅을 못했다는 것. 갑자기 뚝 끊겨버린, 허공에 떠도는 것 같은 죽음은 어떻게 끝맺어야 할까.


곁에서 지켜보던 동생이 아이패드와 펜슬을 건넸다. 성인이 되고 처음 시도하는 그림이었다. 이제껏 해본 적 없는 장례였다. 지니의 사진을 한 폴더에 모으고, 잘 나온 사진을 몇 장 골랐다. 그때부터 장례의 절차가 시작됐다. 신중하게 털 한 올 한 올을 그었다. 가장 어려운 건 전체적인 형태 만들기였는데, 지니의 동그란 얼굴형이 자꾸만 넓적해지는 바람에 수십 번 그렸다 지우길 반복했다. 오직 그릴 때만이 대상을 천천히 뜯어볼 수 있었다. 녹색과 노란색을 오묘하게 섞어야만 나오는 지니의 눈이, 코에서 입으로 연결되는 분홍빛과 왕 눈곱이 새삼스러웠다. 내 손끝의 움직임으로 인해 지니의 모습이 재현됐다. 내 손으로 그 애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꼭 탄생 같아서, 죽음의 개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현실의 존재들을 보살피는데 골몰하다 보면 이런 것들을 자주 잊는다. 현실에 없다면 내 손으로 존재시키면 되었다.


그립다는 말은 '그리다'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여기에 '글'까지 모두 동사 '긁다'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래서 마음으로 그리워하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쓰게 되는 것일까. 마음속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그리움을 손끝으로 옮겨 다듬고, 문장으로 엮어내면서 긴 장례를 치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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