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하는 달리기는 꽤나 자발적인 고통에서부터 시작한다. 우선 달리기에 두꺼운 옷은 적합하지 않다. 얇은 옷을 겹겹이 껴입었지만 여전히 몸은 시리고 무겁다. 맨살이 드러난 얼굴과 손목은 본능적으로 옷 속을 파고들려 하고, 허벅지의 감각은 둔해져서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고통스러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냅다 달려야만 한다.
겨울 달리기의 특별함은 시린 냉기 속에서 스스로 온기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수족 냉증으로 늘 차갑던 손이 갑자기 시리지 않을 때, 그러다 얼마 안 가 열이 나고 땀으로 등이 흠뻑 젖을 때 나는 알게 된다. 어떤 난방 기구보다도 스스로 만들어내는 열기가 가장 뜨겁다는 것을. 마침내 온몸이 뿜어내는 열기에 옷을 열어젖힌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홀로 땀을 뻘뻘 흘리는 건 꼭 야외 노천탕에 들어가 있는 듯한 아늑함을 주고, 남들 다 일하는 월요일 연차를 쓴 직장인 마냥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둘러싼 온도를 바꾸는 일은 겨울 달리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이다. 응당 추워야 할 때에 덥다며 여유를 부리게 된 나는 한껏 고양되고 도취된다.
이럴 때면 빌 헤이스의 <스웨트>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린다. 고대 세계에서는 운동선수가 흘린 땀이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땀을 긁어모아 거래했다는 이야기. 훌륭한 운동선수의 땀에는 ‘탁월함을 향한 매진’을 뜻하는 아레테의 정수가 그 안에 깃들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탁월한 운동선수가 아니지만 냉기 속에서 흘린 땀은 내가 달리기에 매진했음을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봄, 가을의 쾌적한 달리기보다도 겨울 달리기를 할 때면 땀이 왜 그렇게나 고귀하게 여겨졌는지 단번에 와닿는다. 그 땀을 모아 의료 목적으로 썼다던 고대인들의 땀에 대한 집착도 어쩐지 수긍이 가고야 만다.
그리하여 1월 1일, 연말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가 재빠르게 전환되어 조바심을 자아낼 때 나는 달리기를 택한다. 굳이 탁월해질 필요도, 딱히 탁월해질 것 같지도 않지만 탁월한 태도를 흉내 내며 추위와 바람을 뚫고 땀 흘릴 때까지 달린다. 에리히 프롬의 가르침도 함께 떠올린다. '자발적인 활동만이 자아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설계한 소박하고도 자발적인 고통 안에서 안도한다. 달리는 시간만큼은 일상 통틀어 최선의 태도를 갖게 되므로 다가올 삶의 불확실함 앞에서 조금은 의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