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민지 Jun 05. 2024

동네 고양이와 나의 위치

HBO 드라마 시리즈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의 주인공 아라벨라는 이런 글을 쓴다. “강간당하기 전, 나는 자신이 여자임에 주목하지 않았고 내가 흑인이고 가난함에 주목했다. 내 성별이 내 자유와 생존에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을 감히 관찰하려 하는 건 내가 태어난 임대 아파트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곳에서 고난은 성차별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라벨라가 흑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가난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벨라에게 성폭력은 ‘흑인’이면서 ‘여성’인 자신의 자리에 새롭게 주목하는 계기가 된다.


지난 4년간 동네 동네 고양이 돌봄 활동을 하면서 결국 도달한 곳은 내가 위치한 자리다. 여성인 나와 길고양이를 돌보는 내가 교차한 지점에서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방식으로써의 나의 취약함을 마주한다. 특정한 관계나 집단에 속하지 않을 때의 내가, 소비자도 노동자도 아닐 때의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맞닥뜨린다. 사료를 들고 길고양이에게 갈 때, 가면서 주변 사람들을 살필 때, 구석진 자리에서 사료를 꺼낼 때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매번 내 위치로 끌려 들어가고 만다. 맥락 없는 모욕의 경험들이 내 몸 곳곳에 새겨져 나를 위축되게 만들고, 매번 그 종착지는 이 도시에서 내가 위치한 자리가 된다.


고양이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자기 방어부터 튀어나온다. 꾸준히 중성화를 하고 있고, 급식소를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 그래서 최대한 피해 주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고… 캣맘에 대한 일부 혐오적인 시선 때문에 나는 완전무결해지길 원한다. 그러나 완전무결하기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고,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에 혐오의 시선을 받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감히 계집애가?” 라거나, “살기도 힘든데 고양이 밥 주고 지랄” 같은 모욕의 언사는 고양이와는 상관이 없었다. 똑같은 행위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혐오의 내용은 쉽게 바뀌었다. 젊은 미혼 여성인 내가 훈계의 대상이 될 때, 70대 여성 이웃은 나이 들어 할 일이 없으면 집구석에나 있으라는 노인 혐오성 모욕을 당했다. 종종 길고양이 돌봄 카페에 이런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남자가 밥을 주면 건드리지 않더라’, ‘고급 외제차 몰고 와서 밥 주는 여성에게는 아무 말 안 하더라’. 우습지만 만만해 보이지 않아야 시비를 걸지 않더라는 경험담은 ‘캣맘’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팁이다.


맥락 없는 모욕의 경험들은 ‘만만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만든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체격이 더 컸다면? 아니면 부와 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모욕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길고양이 앞에서 여성, 무소속, 저임금 노동자인 나의 장소로 매번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일터에서 나는 선생이라 불리고, 일하지 않을 때의 나는 대부분 소비자, 산책자다. 이때의 나는 대체로 평범한 시민으로서 사회 질서 속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느낀다. 누구도 이유 없이 시비 걸지 않고, 미심쩍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길고양이에게 갈 때면 차지해선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보여선 안되는데 보이는 수상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위축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누군가 내게 다가와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매일 상상한다. 그래서 과민하게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재촉한다. 어깨에 힘도 꽉 주고 때로는 딴청도 피운다.


그리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평범하게 식당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산책을 할 때는 해방감마저 느끼는 것이다.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이렇게 썼다. ‘여성에 대한 환대는 여전히 조건적이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밤거리를 걸을 때나 택시, 술집 등에서 나는 다른 여성들만큼 날을 바짝 세우긴 하지만 고양이에게 밥 줄 때만큼은 아니다. 돌봄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나 자신이 여자임을 더욱더 주목하게 만든다. 내가 느끼는 시선은 도시에서 길고양이의 위치와 같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 아닌 이질적 존재, 하등하고 오염된 존재. 내가 느끼는 위험과 위축에는 비인간 동물에 대한 종차별적 시선과 여성 혐오적 시선이 얽혀있다.


장애 해방과 동물 해방에 관한 수나우라 테일러의 저작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일부 19세기 의사들이 ‘동물 애호 정신병’을 지어냈다는 것이다.(다이앤 비어스, 잔혹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동물 권리 운동의 역사와 유산) 동물 애호 정신병(동물에 대한 지나친 염려)은 여성에게서 진단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영국과 미국의 초기 동물 옹호 운동가들이 주로 여성이었기 때문이며 ‘이런 혐의는 여성과 비인간 동물 모두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고 테일러는 설명했다. <에코 페미니스트>의 캐럴 제이 애덤스 또한 일찍이 19세기 말부터 영국 여성들은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는 방식과 동물들의 위치가 결정되는 방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세기 여성 동물 운동가들이 인식한 이중 억압은 2024년의 내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일부 종위계주의자들에 의해 구분되는 방식으로 길고양이와 똑같이 ‘하찮은’ 존재로 취급된다. 그러나 스스로를 길고양이와 비슷하게 느끼는 방식을 좋아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양이와 함께 숨죽이며 그들이 느낄 두려움에 공감할 수 있다. 고양이의 언어를 경청할 수 있기 때문이고, 무장해제하고 배를 드러내는 고양이 앞에서는 약한 자들의 아름다운 신뢰의 세계에 발들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의 다른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