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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만화, 우주소년 아톰

일본 만화의 전설이 된 데즈카 오사무 만화 박물관

최근 한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애니메이션 우주소년 아톰 6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시작했다. 얼마 이상을 구매하면 아톰 쿠션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언제 적 아톰이지? 하고 웃어넘기려던 순간 옆에서 가게에 붙은 포스터를 보던 동생이 중얼거린다. 이번에 일본에 가면 아톰 티셔츠를 사다 줘.

     

캐릭터 상품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건 의외로 역사가 깊다. ‘띠부띠부씰’이 빵과 함께 봉지 속에 동봉되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리고 1963년, 일본에서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우주소년 아톰(원제: 鉄腕アトム)’이 인기를 누릴 때 메이지 제과는 마블 초콜릿 포장지 속에 아톰 스티커를 부록으로 넣었다. 띠부띠부씰의 시초 격이다. 일본에서는 떨어졌다 붙였다 하는 스티커를 씰(シール) 아니면 데코캬라씰(デコキャラシール)이라고 부른다. 당시 일본의 꼬마들은 아톰 스티커를 얻으려고 옆 마을 슈퍼마켓까지 돌아다니며 초콜릿을 샀다. 스티커를 사니 빵을 주더라는 우스갯소리는 이렇게나 오래되었다.

    

전적으로 캐릭터의 인기에 의존하는 판촉사업이기 때문에 방영이 끝나거나 인기가 한물가면 자연스럽게 씰도 사라진다. 그런데 신기한 일도 일어난다. 옛날 만화의 인기가 돌고 돌아 현재에도 안착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포켓몬 빵과 띠부실은 지금의 초등학생들에게도 이른바 먹히는 아이템이다. 박물관 체험실에 찾아온 아이들에게 포켓몬 캐릭터를 활용한 퀴즈를 내면 눈을 반짝이며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등 뜨거운 반응이다. 세대 차이를 한순간에 없애준, 세대를 초월한 인기 만화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톰 세대가 아니다, 하지만 아톰 쿠션은 갖고 싶다는 동생은 그저 귀여워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서 익숙한 아톰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푸른 하늘 저 멀리, 랄랄라 힘차게 날으는 우주소년 아아톰 용감히 싸워라…. 아마도 동생을 위해 아톰 티셔츠를 사 올 수 있겠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번에 일본 오사카에 가면 효고현으로 넘어가 다카라즈카에 있는 아톰 뮤지엄에 갈 것이고, 그곳엔 티셔츠를 포함해 아톰의 모든 것을 팔고 있을 거란 기대다. 아무렴, 1960년대에도 띠부실을 만들어 팔던 아톰인데.



# 오전 10시, 효고현 다카라즈카역


11월, 가을볕이 좋은 어느 날. 오사카 우메다역에서 한큐 전철을 타고 효고현으로 넘어갔다. 30분 이상 달려 종점까지 오니 ‘다카라즈카(寶塚)’라는 도시가 나왔다. 1928년에 태어난 데즈카 오사무가 다섯 살 때부터 약 20년 간 청년 시절을 보낸 동네다. 데즈카 오사무는 아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일본만화의 아버지, 그리고 일본의 월트 디즈니라는 칭호까지 부여받은 만화계의 거장이다. 사실 뮤지엄의 이름도 아톰 뮤지엄이 아니다. 내가 향하는 그곳은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手塚治虫記念館)’, 영어로는 데즈카 오사무 만화 박물관(The Osamu Tezuka Manga Museum)이다.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으로 걸어가는 길.


다카라즈카는 오사카와 고베 같은 대도시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고급스러운 주택이 많다. 유럽풍 건물이 즐비한 가운데 골목길과 작은 공원조차 미술관 풍경화를 걸어놓은 듯하다. 박물관까지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는 다카라즈카 가극단 대극장과 작은 상점들이 메우고 있다. 가극단 공연이 인기가 많은지 가게들 안에도 배우의 사진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역시 다카라즈카의 자랑은 데즈카 오사무다. 다카라즈카 시제 70주년을 맞아 도시의 로고도 새로 제작했는데, 그 안에는 불새가 그려져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불새(원제: 火の鳥)>는 그가 말년까지 꾸준히 그리고 연재한 작품이다. 그는 개인적인 소회로 <우주소년 아톰>을 최대의 실패작으로 꼽은 적이 있지만, <불새>만큼은 분명 작가로서의 철학과 인간으로서의 사명감을 쏟아냈다는 것이 느껴진다.  

    

<불새>는 만화책 약 한 권 또는 두 권 분량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이 나열된다. 각 에피소드는 시대도 다르고 등장인물도 다르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핵심에 불새가 있다. 불새는 생명이자 구원이 되기도 하고, 인간을 시험하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우주를 초월해서 절대자처럼 모든 것을 관망하다가도 어느 순간 한 인간의 작은 삶에 개입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불새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데즈카 오사무는 불새의 관점을 빌려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인간상을 녹여낸다.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야마토 편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라현 아스카촌에 석무대 고분이라 불리는 만들다 만 무덤터가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안이 훤히 드러난 이 무덤은 어쩌다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어쩌면 이곳에 묻힌 왕에게 여러 가지로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는지도…. 자, 이런 얘기는 어떨까요?


<불새> 야마토 편은 나라현 아스카 석무대(石舞台)를 배경으로 한다. 데즈카 오사무는 아스카 일대를 답사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았을 것이다. 무덤은 어쩌다 만들다가 말았을까? 무덤이 아니라 정말로 공연을 위한 무대는 아니었을까?   

   

그는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자신을 위한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많은 사람을 순장시키려 한 야마토 국왕에 반대하는 오구나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오구나 왕자는 야마토 국왕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진실의 역사를 적으려던 쿠마소의 족장에게 감화되고, 무덤 공사의 감독을 맡게 되었을 때 무덤이 아니라 무대를 만들기로 한다.

      

역사의 변두리로 남거나 아예 적히지 않는 나라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대불을 보고 감탄하기보다는 그걸 만들기 위해 노예처럼 착취당하고 죽은 백성에 대한 이야기…. 데즈카 오사무는 단순히 사건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너머의 세계를 그려내고 읽는 사람이었다.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거의 도착했다.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불새>에 등장하는 불새 동상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날개를 활짝 편 불새가 나타났다. 이제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이다. 그의 에세이, ‘유리의 지구를 구해줘(ガラスの地球を救え)’를 모티프로 만든 건물이라 유리로 된 지구가 박물관의 꼭대기를 장식한다. 기념관 앞 작은 마당은 마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처럼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속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핸드프린팅이 남겨져 있다. 아톰의 조그마한 손바닥, 밀림의 왕자 레오의 발자국, 그리고 불새의 발까지. 불새의 흔적을 보니 맹금류는 아니고 발톱 정리도 한 깔끔한 모양새다. 꼬리가 길어 앉은자리에 함께 자국이 찍혀버린 모습이 보는 이를 웃음 짓게 만든다.



# 전시실, 시간을 잊는 공간


정문으로 들어가면 1층 리셉션 공간이다. 이곳은 티켓을 구매하는 자판기, 데즈카 오사무의 삶과 그의 작품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 상설전시실이 있다. 왼쪽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어떤 과학자의 실험실에 들어온 것 같다. <불새> 미래 편에서 사루다 박사가 지구 생명을 복구하려고 실험하던 캡슐처럼 생긴 원통이 진열장 역할을 한다.      


원통형의 진열장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토론을 펼쳤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귀동냥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요즘 말로는 ‘디깅’이라고 하는, 한 분야에 파고들면서 자신만의 취향이나 전문성을 드러내는 ‘덕질’ 중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봤는지, 그들은 각 진열장마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1층 상설전시실.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과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었다.


상설전시실의 끝에는 영상실이 있어 데즈카 오사무의 생애에 대한 영상과 단편 애니메이션 두 편을 관람할 수 있다. 단편 애니메이션 <점핑(ジャンピング)>은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작품이다. 붕 하늘 위로 날 듯이 떴다가 어느 순간 중력의 힘에 이기지 못해 착지하고 마는 영상은 어릴 때 자주 꿈에서 겪은 일과 비슷하다. 꿈에서는 몸이 말을 잘 듣지 않고 결박당한 듯 의도치 않은 곳으로 점핑한다. 그렇게 세상 구경을 마치고 마을에 돌아온 주인공은 휴우, 하고 다행이라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다. 아이의 꿈이었을까, 아니면 동요 '앞으로'처럼 지구는 둥그니까 온 세상을 보고 오고픈 꿈 속의 꿈이었을까.      


영상을 관람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G층이다. 들어갈 때부터 벌써부터 시끌벅적 요란하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공간이다. 이곳엔 ‘아니메 공방(アニメ工房)’이 있어 애니메이션을 직접 그릴 수 있다.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고 해 들어가지는 못했다.    


G층 아니메 공방. 아이들의 체험 공간이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2층 기획전시실이 있다. 올해 11월 3일부터 2024년 2월 18일까지 애니메이션화를 기념하여 ‘플루토’ 전시를 연다. <플루토>는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우주소년 아톰> 중 '지상 최강의 로봇' 편을 원작으로 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인데, 2009년의 작품이니 벌써 오래 전이다. 만화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마침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최종화까지 정주행을 했다. 그러니 기획전시실에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심박 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이 장면!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박힌 채 사람과 로봇이 차례로 연쇄 살인을 당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기획전시실 벽면에 걸린 장면마다 멈춰 내용을 복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아톰보다 노스 2호, 게지히트 등 다른 지상 최강의 로봇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작품이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애정을 듬뿍 담아 노스 2호의 전쟁에서 상처입고 기운 없이 늘어진 것 같은 기다란 팔과 다리를 눈에 담았다.


2층 기획전시실. 넷플릭스 <플루토>의 장면을 재생하는 화면과 원화가 전시되어 있다.
노스 2호의 망토 속에 숨겨진 전투에 특화된 몸


기획전시실에서 나오면 복도를 지나 라이브러리와 휴식공간이다. 이곳이 박물관의 백미가 아닐까. 라이브러리 때문에라도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은 두 번, 세 번 잇달아 방문할 가치가 있다. 입장 티켓을 살 때 나눠준 포인트 카드가 이해되었다. 3번 방문해서 포인트 카드에 스탬프를 찍으면 1번은 입장료가 무료다. 체험에 특화된 박물관은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한 번 체험했으니까, 그걸로 된 것이다. 그러나 데즈카 오사무 자체가 콘텐츠인 이상,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만나려면 계속해서 방문해야 한다. 박물관을 오래도록 머무르는 공간으로 만드는 힘이다.



# 오후 2시, 기념관을 나오면서


2층에는 기념품을 살 수 있는 작은 뮤지엄숍이 있다. 우주소년 아톰뿐만 아니라,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도로로(どろろ)>,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등 그의 작품 일러스트가 그려진 기념품을 판매한다. 아톰 카레의 일러스트는 시선을 잡아당긴다. 사고 싶어,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카레는 그냥 카레일 텐데, 포장지 때문에 이 돈 주고 살 순 없지. 그러다 진열대에서 휴지를 발견했다. 블랙잭 일러스트가 그려진 휴지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하고 물어보던 어린이 괴담 속 휴지처럼 색깔이 번쩍거린다. 아, 이것도 사고 싶다. 그런데 굳이 왜 블랙잭으로 볼일을 봐야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바구니에 하나씩 집어넣는다. 쓸데없는 걸 알면서도 이런 유혹에 약해지니, 참 어쩔 수가 없다.


아톰 인형. 가방에 달고 다니면 귀엽다.
<리본의 기사>와 <우주소년 아톰> 카레 상품이다. 먹으면 아톰처럼 10만 마력 힘이 솟는다고 적혀 있다.
<블랙잭> 화장실 휴지.

     

역시나 뮤지엄샵에는 아톰 티셔츠도 있다. 아톰만 있는 게 아니라 각 캐릭터와 작품마다 모든 티셔츠를 다 구비해 놓았다. 좋아하는 작품 별로 골라갈 수 있으니 소비자의 마음을 잘 알고 선택권을 많이 주는 바람직한 뮤지엄샵이 아닌가? 아톰 티셔츠도 색깔과 일러스트를 다르게 만들어 종류가 다양하다. 나는 동생에게 무슨 티셔츠가 잘 어울릴까 고민하면서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나에게 어울릴 만한 것도 함께 골랐다. 관성적인 이끌림이다.


아톰 세대도 아닌데 왜 아톰이 갖고 싶은가? 왜, 다시 아톰일까? 아톰은 1960년대 최고 인기 만화였고, 아톰을 창조한 만화가는 1989년에 타계했고, 2003년생 아톰은 이미 스무 살이 지났으며, 아톰을 보고 자란 세대는 중년이다. 그런데 캐릭터 상품과의 승부에서 져버린 나는 코 묻은 돈을 긁어모으고 잘못된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제과업체의 상술이다,라고 당당히 비판할 수가 없다.      


바구니 속에는 아톰 인형과 아톰 클리어파일도 들어갔다. 빵에 들어있는 띠부실이든, 띠부실에 딸려온 빵이든 이 상품들은 아이들의, 그리고 한때 아이였던 모든 이들에게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손에 넣었다는 작은 만족감을 준다. 그리고 수집욕을 자극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을지언정 오늘의 아톰 기념품은 나와 함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박물관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갖은 기념품과 4권짜리 <도로로> 만화책을 사니 제법 쇼핑백이 무거워졌다. 출구로 나오는 길에 한 사람을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2층 서적 코너에서 만난 관람객이었다. 미국인인 그와 서적 코너 직원은 각자 영어와 일본어를 쓰고 있어서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게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나서도 괜찮을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통역을 했다. 다행히 그들은 제삼자의 잠깐의 간섭에 기뻐했다. 그곳에서 책을 잔뜩 샀는지 그의 양손에 커다란 쇼핑백이 가득하다. 나처럼 데즈카 오사무를 만나려고 바다를 건넜을 그의 한껏 무거워진 뒷모습이 경쾌하다.


 [끝]    



※ 작품명은 모두 한국어판에 사용된 제목으로 작성했으며, 원제목도 함께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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