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방문하려고 하는 박물관은 일본의 국민만화를 그린 한 만화가의 기념관이다. 그는 여성이고, 작품의 이름은 ‘사자에상(サザエさん)’이다.
일본의 여성 만화가? 사자에상? 흠,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사자에상’을 그린 만화가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국민 작가 반열에 오른 아주 유명한 만화가라는 사실! 대표작인 ‘사자에상’은 2009년 아사히신문에서 발표한 ‘일본 만화역사에 길이 남을 쇼와 걸작 만화 순위’에서 무려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사자에상’은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네 컷 만화였으니, 그것도 참작되었을 테지만. 참고로 1위는 전설적인 권투 만화, ‘내일의 죠(あしたのジョー)’였다.
‘사자에’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후반 젊은 여자가 주인공인 네 컷 만화 ‘사자에상(번역한다면 사자에 씨)’이 일본에서 얼마나 대단한 만화인지는 기록으로 엿볼 수 있다. 한국인으로선 잘 와닿지 않으니 숫자와 수상실적으로 가늠해보려 했다. ‘사자에상’은 1946년부터 1974년까지 신문지 속 네 컷 만화로 연재되었고, 연재 횟수는 총 6744화에 달한다. 큰 인기에 힘입어 ‘사자에상’은 1969년 애니메이션화되었는데, 현재까지도 매주 6시 30분 후지 TV에서 시청할 수 있다. 그러니까 50년 넘도록 방영된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기록이라 최장기간 방영한 애니메이션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만화를 그린 하세가와 마치코는 일본국민영예상(國民榮譽賞)을 받았다. 상을 수여한 일본 총리는 만화 ‘사자에상’이 일본 사회에 윤택함과 평온함을 가져다준 공로를 인정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후지테레비(フジテレビ)에서 방영 중인 '사자에상' 애니메이션
그뿐만 아니다. 하세가와 마치코(1920~1992, 이하 ‘마치코’)는 일본 최초의 여성 프로 만화가다. 마치코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를 꿈꿨는데, 당시 만화 ‘노라쿠로군’으로 엄청나게 성공했던 타가와 스이호(田河水泡, 1899~1989)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타가와 스이호는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마치코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때, 마치코는 겨우 고등학생이었고, 심지어 여성이었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사자에상’이 왜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았을까? 일본의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전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양지와 음지에서 활발히 소비되고 있었던 터인데.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사자에상’은 나이를 많이 먹어 쭈글쭈글한 할머니 같은 만화라서 그런 것 같다. 멋진 작화에 스토리도 탄탄한 만화가 한 트럭인데, 아무리 잘 포장해도 케케묵은 노인네 냄새가 새어 나오는 만화가 먹히기는 어려우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사자에상’에게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사자에는 할머니가 아니라 생기 넘치는 20대 주부다. 그런데 왜 만화가 할머니 같다고 느껴질까? 그건 일본의 근현대사와 함께 푹 고아진 곰국 같은 만화라서 그렇다. 일본인들은 1940년대 중반 종전 직후, 힘들던 시기부터 한국전쟁을 디딤돌 삼아 경제성장을 이루면서도 사자에상을 보며 고락을 함께했다. 사자에와 그 가족들은 히어로도 아니고, 초능력자도 아니다. 옆집 사람들처럼 또는 나의 일처럼 평범하고 이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도 사소하기 그지없다. 그런 만화를 일본사람들은 70년 넘게 애독하고 있다. 젊고 예쁘던 시절에 처음 만나 살을 부대끼고 살다가 어느새 노인이 되었으니 그간 정이 얼마나 쌓였겠는가? 그러니까 사자에상은 필연적으로 외국인과는 말이 잘 안 통하는 일본 할머니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사자에상’은 피식 웃게 만드는 면이 있다. 사실 일본의 문화와 사회적인 상황을 몰라도 별로 상관없다. 대부분 시시콜콜한 가족의 이야기다. ‘사자에상’이 내게만 웃긴지 궁금해서 친구에게 시험 삼아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사자에의 집을 료칸으로 착각한 어떤 사람의 전화를 받고 당황한 가족들이 그 손님을 위해 집을 료칸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결심한다는 에피소드였다. 그러자 친구는 ‘재밌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한데?’라고 반응했다. 그렇다. 다행히(?) ‘사자에상’은 재밌다. 하지만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만들거나 엄청난 반전으로 뒤통수를 때리지는 않는다. 약간 이야기를 비튼 다음 ‘사실은 이렇지롱’하고 놀리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귀여운 할머니다.
도쿄 세타가야구의 사쿠라신마치(桜新町)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역사를 빠져나오니 지극히 평범한 일본 동네다. 이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하세가와 마치코가 살던 동네’라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길거리에 사자에 캐릭터가 인쇄된 깃발이 펄럭이고, 여기저기에 세워진 사자에 동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1987년, 사쿠라신마치 상점가는 ‘사자에상 거리(サザエさん通り)’라고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마치코가 젊은 시절 만화가로 발돋움했던 후쿠오카에도 같은 이름의 거리가 있다. 마치코는 민망해하며 작품 연재가 끝났으니 어차피 오래 못 갈 이름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지만, 2023년 지금까지도 사자에상은 사쿠라신마치의 얼굴이다.
사쿠라신마치의 상점가는 거리에 '사자에상' 이름을 붙였다.
마치코와 자매들은 사쿠라신마치에 박물관 두 동을 만들었다. ‘하세가와 마치코 기념관’과 ‘하세가와 마치코 기념 미술관’이다. 입장권을 구매하려면 먼저 미술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인 1명, 900엔에 미술관과 기념관 두 군데 관람이 포함되었다. 미술관은 한창 ‘봄이여, 오라(春よ来い)’는 기획전시 중이다. 봄기운을 가득 담은 매화와 벚꽃을 그린 그림들이 1층과 2층의 널따란 전시장에 걸렸다. 마치코와 자매들이 직접 수집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2층 구석 작은 방에는 사자에상 등장인물 관계도와 주택 디오라마가 전시되어 있다. 사자에상을 그린 마치코가 아니라, 미술품을 좋아해 열렬히 수집하던 마치코를 먼저 만나야 하는 구조다. 아무리 봐도 끼워팔기다.
나중에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이지만, 원래 기념관보다 미술관이 먼저였다. 마치코는 좋아하는 미술품을 잔뜩 수집했고, 미술관 건립에 열의를 보였다. 외벽의 벽돌 한 장, 내부 인테리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 1985년 드디어 미술관을 개관했을 때, ‘사자에상’의 ‘사’ 자도 꺼내지 않은 채 호기롭게 시작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그래서 관람객을 좀 끌어보고자 미술관 2층에 ‘사자에상’ 원화 전시를 시작했다. 그랬더니 팬들이 몰려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 대중 앞에 나서길 꺼리는 성품을 가진 마치코는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미술관 앞에 팬들이 쭉 늘어선 줄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세가와 마치코 기념관의 입구
목적은 기념관이었기에 미술관은 간단하게 돌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전시장 지킴이의 손짓에 따라 홀린 듯이 미술관 갤러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뭔가 예의상 마치코의 수집품들을 열심히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원봉사자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림에 관심 있는 척 들여다보자니 고역이 따로 없었다. 만화를 보러 온 건데, 금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벚꽃 그림이라니. 이곳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고 느껴져 자원봉사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작은 건널목을 하나 앞두고 기념관 건물이 있다. 통유리창으로 관람객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차를 마시고, 만화책을 읽는다. 역시 이곳에 관람객들의 에너지가 모이는 느낌이다.
당연하게도 이곳에는 일본인들뿐이다. 지난번 ‘우주소년 아톰’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의 기념관에서 일본어를 하나도 못 하는 외국인 관람객들이 꽤 방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본 최다 방문 수치를 자랑하는 한국인 관광객의 발길조차 거의 닿지 않는 공간이다. 전시 패널도, 리플릿도 모두 일본어로 쓰여있다. 그나마 영문으로 된 건 기념관 2층의 상설전시장에서 마치코의 일생에 대한 설명을 흑백 프린트한 A4 용지 뭉치가 전부다.
1층 상설전시장에는 ‘사자에상’ 작품 속 배경이 되는 거실을 재현한 전시물이 있다. 흑백 TV와 재봉틀, 화로주전자와 같은 소품과 인테리어가 상당히 예스럽고 일본 스럽다. 1940년대부터 연재를 시작한 ‘사자에상’은 전후(戰後) 인플레이션, 한국전쟁, 경제성장 등 시대상을 거울처럼 반영했다. 일상 소재의 개그 만화니까 당연한 일이다.
마치코가 그렸던 만화 속 가정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 (1층 상설전시관 內)
1940년대 에피소드에서는 하수구 시설 미비로 인해 집안에 쥐가 출몰했던 일을 다루었다. 쥐가 이불을 다 갉아먹어버리자 와카메는 울음을 터뜨렸다. 사자에는 여동생 와카메에게 쥐덫을 선물하기로 한다. 1950년대 이후에는 여권 신장과 선거권 확대에 따라 ‘공처(恐妻)’가 유행하기도 했다. 고양이가 얼굴을 할퀴어 피투성이가 된 채 공처회에 입장하는 사자에의 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그의 얼굴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오해를 할 것이다. ‘사자에상’은 2020년대에도 계속 애니메이션을 통해 방영되지만, 집안 풍경에 스마트폰이나 벽걸이 TV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헤어스타일도 전후 유행했던 그 스타일 그대로다. 이런 요소들이 알게 모르게 일본인이 그리워하는, 쇼와 시대의 향수를 자극한다.
하세가와 마치코 기념관 속 뮤지엄샵
뮤지엄샵 카페에서 주문한 호지차와 말린 파파야
기획전시까지 둘러보고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미술관에서 티켓을 살 때, 뮤지엄샵에서 쓸 수 있는 100엔짜리 쿠폰을 받았다. 미술관에서 기념관, 다시 기념관에서 뮤지엄샵까지. 마치코의 박물관이 기획한 완벽한 동선이다.
주문한 따뜻한 호지차는 말린 파파야 조각과 함께 나왔다. 티슈, 접시, 찻잔, 파파야 조각까지 모두 이 박물관이 뮤지엄샵 상품을 은근히 홍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뮤지엄샵은 도서관이 될 수도 있다. 새 책은 판매용이지만, 중고 책은 견본이라 마음껏 읽어도 된다. 그래서 ‘사자에상’ 1권을 집어 들었다. 사자에가 아직 마사오에게 시집가기 전, 처녀 적 이야기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전시 안내 팻말
우연히 단행본 1권 속에서 전시 안내표시로 사용된 네 컷 만화를 발견했다. 사자에는 상설전시로, 와카메는 기획전시로 가자며 서로의 손을 잡아끄는 그 장면이다. 원래 에피소드에서는 사자에는 잘생긴 군인이 서 있는 다리 쪽으로, 와카메는 사탕을 파는 노점에 가자고 하는데, 결국 승자는 와카메. 명랑한 웃음을 잃지 않는 사자에는 그렇게 져 준다.
사자에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밝게 만든다. 혼란한 시기에 일본인들의 어둡던 마음을 비춘 밝은 빛이었다는 게 이해가 된다. 지금은 네 컷 만화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며 서사도 복잡하고 길어졌다. 하지만 1권 속 초창기 네 컷 만화를 보니, 협소한 4개짜리 칸 안에서도 마음껏 이야기와 상상력을 펼쳐내는 사자에가 드러났다. 마치 할머니의 옛날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 것과 같다. 에피소드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사자에상’은 아주 정감 있는 일본 할머니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