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오카 현의 기타큐슈 만화 박물관
“안녕? 너 알아.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다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평범한 날, 학생회장이 말을 걸었다. 키도 크고, 중저음 목소리에,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는 멋진 아이였다. 여자중학교에서도 그런 아이는 인기가 있다. 같은 반인 적도 없고, 학원도 안 겹치는데 나에게 학생회장이 말을 걸어주다니! 순정만화 속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 황송하기 이를 데 없었다. 1학년 때 도서부에 가입해 틈만 나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던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6년간 쭉 도서부였다. 날 기억하는 친구도 없겠지만, 만약 기억한다면 도서관에서 책만 읽던 애 또는 교과서 밑에 책을 숨겨놓고 읽다가 혼나던 애, 정도일 것이다.
동네에선 어찌어찌 책벌레라고 소문이 났다. 하지만 부모님에겐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하필 그 책이라는 게 ‘만화책’이다. 부모님은 용돈을 넉넉하게 주셨는데, 그 돈을 가지고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매일 같이 서점에 출근 도장을 찍고, 만화잡지나 단행본을 한 권씩 사서 돌아오는 것. 그러다 보니 책장은 금세 꽉 차버린다. 책장 속에서 문제집이 아니라 만화책이 압도하게 되면, 이따금 ‘만화책 화형식’이 열렸다. 실제로 불태우는 건 아니지만, 엄마의 분노는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웠다. 이삿짐을 싸듯 노끈으로 만화책을 묶어 그대로 쓰레기장에 투척. 한바탕 난리가 지나가면, 책장은 싹 비워지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은 곧 불효자식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중학교 내내 전교 등수는 당연히 세 자릿수. 졸업식 때 손에 든 건 개근상뿐이었다. 그래도 웃으면서 졸업했다고 생각하는데, 졸업사진을 다시 보니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미래에는 더욱 험난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던 걸까? 이후엔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부 좀 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특목고나 명문대학 진학률이 높은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부모님도 사립고등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경쟁하기도 싫고 그저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은 나는 집에 말도 안 하고 평범한 공립 고등학교를 1 지망으로 선택했다. 그 비밀은 나중에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에 의해 들통나게 되어 엄청나게 혼났다는 후일담이 있다.
그런데 그 책벌레가 동네에서 일약 스타가 된 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중학교 내신성적으로 수석 입학해 입학식 때 장학금도 받은 친구를 배치고사에서 가뿐히(?) 제치고 1등을 차지. 이후엔 3월, 6월, 9월 잇달아 치르는 전국 모의고사에서 상위 1% 성적을 받아낸 것이었다. 갑자기 특목고나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어릴 때 책을 그렇게 많이 읽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빛을 발하네.”
“역시 독서 지도가 중요하다니까.”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입을 모아 말했다.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된, 아니 성적을 잘 받게 된 데는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도 처음엔 ‘진짜로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하면서 동의할 뻔했지만 이내 곧 어린 시절을 상기시켰다. 아아, 내가 읽은 책의 8할은 만화책이고 나머지 2할은 판타지 소설이었지, 참. 그러니까 책벌레가 아니라 괄호하고 (만화) 책벌레였는데 착각하지 말자.
성적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남아있지만, 이후 나는 수능을 치르고 명문대학교, 대학원에 차례로 진학했다. 역사학, 종교학, 인류학, 민속학…, 돈도 안 되는 이런 공부를 좋아해서 부모님의 근심도 깊었다. 그러다 석사과정 중에 만난 또 다른 대학원생과 결혼하면서 집을 나가게 되었다. 당시 본가에서 독립한 건 내 몸뚱이만이 아니었다. 여러 번에 걸친 화형식에도 살아남은 책들도 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시집갈 때 들고 가라고 창고에 쌓아놓은 거야.”
그땐 정말 엄마한테 감동받아서 울뻔했다. 눈물은 만화잡지들이 무더기로 버려질 때 말라버렸는지 나오지 않았지만. ‘명탐정 코난’ 전권이 쓰레기장에 가지 않고 다행히 대형 박스에 봉해져 창고 속에 잠자고 있었다. 1권부터 하나씩 샀고, 일본판과 미국판도 같이 수집해 나름 소장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던 보물이었다. 분명 빠짐없이 모았는데, 중간중간 빈 단행본이 있어 마저 채워야 했다. 박스 안에는 한승원의 ‘프린세스’와 박은아의 ‘다정다감’ 같은 한국 만화도 일부 생존해 있었다. 모두 어릴 때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던, 사랑하는 만화들이었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박혀 이따금 불쑥 생각나는 책 대부분은 사라졌다. 다시 읽고 싶을 때 손만 뻗으면 닿는 책장에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아주 허전하다.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는 책이 많으니 헌책방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생각한 건, 누군가는 책장에 내가 찾는 만화책을 소중하게 소장하고 있을 텐데, 누군지만 알면 흥정이라도 해볼 텐데, 였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부러웠다.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는 ‘기타큐슈 만화 박물관(北九州市漫画ミュージアム)’이라는 기관이 있다. 일본은 수많은 애니메이터와 오타쿠를 보유한 나라답게 전국적으로 몇 군데 만화 전문 박물관이나 관련된 문화시설이 있다. 그중에서도 기타큐슈에 있는 만화 박물관은 2012년에 개관한 이후 부산에 있는 글로벌 웹툰 센터와 활발히 교류하는 곳이다. 작년에는 한국의 웹툰 만화가들을 초청해 기타큐슈 단체 답사를 진행하고 그곳을 무대로 한 작품을 그리는 프로젝트도 있었다.
한국에서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집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지하철로 1시간 30분, 인천공항에서 기타큐슈공항까지 비행기로 1시간, 공항에서 고쿠라역까지 버스 타고 다시 1시간, 그리고 역사에서 구름다리를 통해 연결된 ‘아루아루시티’ 건물까지 걸어서 2분이다. ‘아루아루시티’의 5층과 6층은 기타큐슈 만화 박물관이 사용하고 있다. 써놓고 보니 가는 길이 꽤 긴 여정이다. 가까운 게 아니라, 가깝기를 바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박물관에 들어가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타큐슈에 살고 싶다..”
이곳은 그야말로 만화 천국이다. 기타큐슈 만화 박물관은 5층엔 기획전시실이, 6층엔 상설전시실과 ‘열람 존’이 있다. 열람 존이란 만화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무려 약 7만 권의 만화책이 서가에 꽂혀있다.
이곳은 옛날 흘러간 명작 만화와 최신 작품까지 완비한 만화책 도서실이다. 만화책을 추천하는 ‘큐레이션 코너’도 있는데, 최근에 인기가 많은 ‘블루록(ブルーロック)’이라는 축구 배틀물과 기타큐슈 축구팀 홍보를 겸하고 있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추억의 만화를 찾아주거나 만화 관련 상담을 할 수 있는 ‘소믈리에 코너’도 있다. 만화 소믈리에는 얼마나 많은 만화책을 읽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걸까? 모집 공고가 난다면 도전해 볼 수 있을까?
편안하게 만화책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소파와 쿠션이 많았지만, 이곳에 누워서 읽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을 한 장씩 조심스럽게 넘겼다. 만화책을 대하는 관람객들의 진지한 자세와 태도라 할 수 있다. 기타큐슈 만화 박물관은 연간 패스포트 제도를 통해 1년 내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데, 가격은 성인 2,400엔이다. (초등학생은 1,200엔, 중고등학생은 1,800엔이다.) 1번 방문할 때 관람료가 480엔이니, 1년에 6번 이상 온다면 이득이다. 만화카페보다 훨씬 저렴한 데다가 장서도 비교 불가 수준이다. 이런 만화책 도서관을 동네에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이용하는 기타큐슈 사람들은 참 복 받았다.
‘열람 존’으로 넘어가기 전, 상설전시실에 있는 ‘만화 타임터널’도 재밌는 공간이다. 일본의 초창기 만화인 1940년대 ‘아카혼(赤本)’부터 최근 2010년대 전 세계적인 히트작까지 일본 만화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전시다. 여기에서도 유리 찬장 안에 들어있는 유물 같은 만화책을 제외하곤, 모두 자유롭게 가져가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 열람할 수 있다. 아카이브가 대단한 박물관이다.
이곳이 더욱 재밌는 이유는 2000년대에 학창 시절을 거치며 섭렵한 만화책이 알고 보니 일본의 만화사를 관통한다는 점이었다. 1950년대 우주소년 아톰, 1960년대 악마군, 1970년대 유리가면, 1980년대 드래곤볼, 란마 1/2, 1990년대 꽃보다 남자, 이누야샤, 명탐정 코난, 2000년대 블리치…,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특정 시대의 만화에 빠진 게 아니라, 아주 옛날 만화도 익숙한 작품이 많다는 게 신기하다. 만화는 이렇게 수명이 길다.
전시공간에서 특별하게 부각하는 코너는 따로 있다. 만화가 마쓰모토 레이지(松本零士, 1938~2023)의 작품전시와 생애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친 ‘은하철도 999(銀河鉄道999)’의 원작자다. 기타큐슈 만화 박물관에서 특별취급하는 이유는 그가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서 태어나고, 9살에 기타큐슈시 고쿠라로 이사를 와서 성장한 것과 연관이 깊다.
마쓰모토 레이지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주간소년킹(週刊少年キング)이라는 만화잡지에 ‘은하철도 999’ 안드로메다 편을 연재했고, 1996년부터 1999년까지는 빅골드(ビッグゴールド)에서 이터널 편을 연재했다. 두 만화잡지사 모두 연재가 종료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휴간에 폐간되는 수순이었지만. 한편, ‘은하철도 999’는 1978년부터 애니메이션화되어서도 대히트를 기록했다. 충격적인 묘사와 반전으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우주를 횡단하는 증기기관차라는 매력적인 소재와 금발의 예쁜 메텔이 상징적이다.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하면 늙고 병드는 인간의 몸으로, 돈이 많으면 기계의 몸으로 바꿔서 영생의 삶을 사는 미래사회에서 주인공 철이는 엄마와 함께 기계인간이 되는 꿈을 품는다. ‘프로메슘’이라는 별에서는 공짜로 기계의 몸을 준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을 사냥하는 기계백작에 의해 철이 엄마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기계백작은 빼어난 미인이었던 철이 엄마를 박제해 전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슬픔과 분노에 잠긴 철이는 기계백작과 그 무리들에게 복수를 하고, 살인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철이는 메텔을 만나 기계인간이 되기 위한 철도여행을 떠난다.
- '은하철도 999'의 주요 줄거리
어렸을 때 분명 열성적으로 빠져들었는데, 세세한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추억 속의 만화, ‘은하철도 999’를 다시 생각하며 한참 앉아있다가 박물관을 나섰다. 오후에는 모지코항에 가서 야키카레도 먹고 간몬 해협 박물관에도 갈 예정이었다. 오늘치 만화는 충분히 충전했으니 더 앉아있을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한번 오고 끝나는 박물관이 아니다. 우리 집 책장을 대신하고, 대단한 장서를 보유했어도 만화책은 별로 없는 공공 도서관을 대신하는 공간이다. 부모님께 혼날까 봐, 책장이 작아서, 책값이 비싸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만화책을 소장하지 못해도 괜찮다. 이런 박물관이 동네에 있었다면, 나의 비밀스러운 독서 활동도 제자리에서 해소됐을 테니까. 이상 언제까지나 만화책을 읽는 사람이고 싶은, 한 때 소문났던 동네 책벌레의 이야기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