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의 나카노 브로드웨이 만다라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취향이 확실해서 좋다.
국내도서 또는 해외도서? 하드커버 또는 페이퍼백?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읽어보고 사는 걸 좋아하거나 인터넷에서 툭, 장바구니에 넣어 간편하게 구매하거나. 베스트셀러나 추천도서를 읽는 편일 수도 있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사는 타입일지도. 아니면 책 한 권에 집중하기보다 다섯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읽는 걸 좋아할 수도 있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그것 또한 문제로다!
그중에 나는 어떤 유형이냐고 물으신다면 ‘새 책만 사는 사람’이다.
우연히 책을 넘기다가 한 구절에 꽂혀서 사기도 하고, 주변에서 추천해 줘서 사기도 하고, 무슨무슨 대단한 상을 받았다더라 해도 산다. 서점에서도 사고 인터넷서점도 자주 이용한다. 이렇다 보니 책뿐만 아니라 책장이 늘어 집이 비좁아졌다. 본가에도 아직 쌓아놓은 책이 한가득이라 얼른 가져가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들락거릴 때마다 거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책으로 산더미를 만들어놓고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지적 허영이고 한 명뿐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과시욕이다. 어떤 책은 사놓고 한 번도 손길이 가지 않기도 하니까. 나중에 서점 차리면 딱이겠네, 남편은 그렇게 말한다. 그렇다. 언젠가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고양이 빌딩을 만들지, 뭐!
새 책을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다.
첫째, 불확실성을 낮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새 책은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편이다. 대부분은 코딱지, 침, 출처 모를 자국 등 온갖 오염으로부터 말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다음 장을 넘기는 순간, 화들짝 놀라 던져버릴 뻔한 일이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벌레의 사체가 떡하니 들러붙어 있었다. 제발 도서관 책으로는 벌레를 죽이지 말자.
둘째, 기분이 좋다. 새 책 강박증이라고 불러도 뭐라 변명할 말이 없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표지를 접지도 않고 종이를 구기지도 않는다. 밑줄도 긋지 않고 메모도 하지 않는다. 항상 새 책인 것처럼 깨끗하고 빳빳한 상태로 보존되길 원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읽어도 산뜻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중고를 사야 할 때도 있다. 책은 절판되기 쉽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조차 취급하지 않을 때도 있다. 최근에는 불현듯 어릴 때 재밌게 읽던 만화책이 생각났다. 중간중간 웃긴 장면이 떠올랐지만 전체 줄거리가 뿌연 연기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장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국의 중고 서점에서 발품을 팔아 책을 구해보려고 애썼다. 겨우 손에 넣긴 했지만 만족도는 낮은 편이었다. 옛날 만화방에서 돌아다니던 물건이라 너무 많이 닳고 더러워진 탓이다.
어쩌면 일본에서는 새 책 같은 중고책을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만화책을 전문으로 한 중고서점 중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만다라케(まんだらけ)’를 찾기로 했다. 모리나가 아이(森永あい)의 작품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쿄도 나카노구 브로드웨이로 향했다. 만다라케는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있는 가게가 본점이다.
만다라케는 만화가가 만든 만화책 서점이다. 창업자 후루카와 마스조는 젊은 시절 『가로 ガロ』라는 만화잡지에서 활약하던 떠오르는 신예 만화가였다. 그에게는 예술적 재능만 아니라 사업수완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1982년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중고서점 ‘만다라케’를 열었고, 만화책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중고 만화책은 시세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희소가치가 있는 서적을 발굴해 고서적으로서 거래될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들었다. 후지코 후지오 콤비의 작품에 100만 엔짜리 가격표가 붙은 건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마침 나카노 브로드웨이 상권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1966년 주상복합시설로 개발된 이곳은 1980년대 이후 주변 신주쿠, 이케부쿠로 등 상권이 크게 발달하면서 도태되던 중이었다. 기존에는 잡화점, 의약품 판매점, 서점과 같은 일반적인 가게가 주류였지만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마니아 수요층을 위한 요란한 가게들이 들어왔다.
그러다 만다라케를 만난 나카노 브로드웨이는 날개 달린 듯 오타쿠들이 모여드는 서브컬처의 성지가 되었다. 지금도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장난감 등 마니아틱한 거래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여기라면 당연히 모리나가 아이의 작품이 있겠지? 그는 꽤 출세한 만화가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일본 외 나라에서도 드라마화되어 팬층도 두터운 편이다. 그중에서는 귀공자처럼 생겼지만 사실 알고 보면 빈털터리에 생활력 만렙인 고등학생 주인공을 그린 『타로 이야기(山田太郎ものがたり)』가 유명하다. 이외에도 『키라라의 별』, 『나와 그녀의 XXX』 등 작품이 국내에 출판되었다.
모리나가 아이 작가는 2019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것도 독자의 입장이다. 사인도 알려지지 않았으니 지병이 있었는지, 얼마나 오래 앓았는지도 알 수 없다. 한 명의 독자로서 그저 당혹스럽고 슬픈 기분이었다. 한국의 한 언론에서는 그가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모리나가 아이의 경력은 1991년 대학 졸업 후, 1993년 만화가 데뷔라고 알려져 있으니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만큼 얼굴, 나이는 물론이고 본명 등 개인정보가 일절 공개되지 않아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만다라케 순정만화 코너는 사람이 없고 한산했다. 장르, 출판사별로 구획이 나뉘고 작가 이름순으로 ‘마미무메모’의 끝자락에서 ‘모리나가 아이’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다. 모, 모, 모…. 아무리 뒤져보아도 모리나가 아이는 없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파르페틱!(パフェ ちっく!)』도 있는데 왜 없는 걸까….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직 포기하긴 이를지도 모른다. 만다라케는 나카노 브로드웨이에만 2층부터 4층에 나눠 7개 지점이 있다. 휴, 너무 크다! 슬슬 다리도 아프고 익숙지 않은 글자를 보느라 눈도 피곤하다. 대신 하세가와 마치코 기념관에서 못 샀던 『심술쟁이 할머니』를 구매했다.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냥 세 잎짜리로 만족하기로 했다. 푸릇푸릇한 클로버 사이에서 네 잎을 못 찾았다고 실망하는 법은 없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다음번에는 눈앞에 나타날 수 있으니까.
도쿄의 나카노(中野)라는 동네를 알게 된 건 우연히 만난 짧은 글 덕분이었다. 2006년에 간행된 『우연한 산보(散歩もの)』라는 만화책 끄트머리에는 쿠스미 마사유키의 비하인드가 살짝 들어가 있는데, 다니구치 지로의 작화로 표현되지 못한 글 하나가 남아있어 원작자의 서운함을 달랜다.
쿠스미 마사유키는 옛날부터 ‘나카노 브로드웨이 위에는 아파트가 있는데, 그 옥상에 주민들만 출입할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금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연한 산책을 시작하는데, 지인이 운영하는 3층의 작은 서점 ‘타코 셰’도 빼먹지 않았다. 마니아 취향의 만화, 서적, 비디오, 잡지 등이 뒤섞여 있고 가끔 작가의 개인전시도 열리는 공간이다.
나 역시도 쿠스미 마사유키의 글을 따라 ‘타코 셰(タコシェ)’에 들어가 보았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금지된 장소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어 가만있지를 않았다.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싶은 오래된 책과 학생들이 자기들 취향에 따라 떡제본으로 만든 듯한 문집 같은 잡지도 눈에 띄었다. 뭔가를 사고 싶은데, 뭘 사야 할지 몰라서 떠밀리듯 빠져나왔다.
나카노 산책은 결국 작품으로 완성되진 못했지만, 쿠스미 마사유키는 이렇게 말한다. “산책에 헛걸음이란 없다. 아니, 산책이란 우아한 헛걸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