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찰실에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의 눈이 동그랗다. '왜 또 왔냐'는 의문이 실린 눈빛. 2년 반 전의 진료를 끝으로 한 번의 이벤트가 있었지만 그 뒤로 잘 지내왔다, 이번에 용기 내 비행기를 타보려고 하는데 그 생각 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니 약을 좀 받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선생님이 씩 웃는다.
"약을 미리 먹고 타 보시죠."
난 불안을 직면해보려고 했는데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마지막 증상을 끝으로 2년 넘게 잘 지내왔으니 굳이 잠자는 공황의 콧털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걸까. 유학생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약을 먹고 비행기를 탄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저 손바닥을 비비며 선생님의 처분에 따랐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저 말투가 왜 내겐 늘 위안일까.
육아휴직이 곧 끝나니 이번 여름방학이 마지막 탈출구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외여행을 나서서 자처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두려우니까. 다만 올해로 소멸되는 항공 마일리지가 4만 쯤 되었다. 날려먹을 순 없지. 그렇다고 제주도? 너무 가깝다(그리고 제주도는 배로도 갈 수 있다). 그렇게 해외로 눈을 돌렸다. 첫 배낭여행에서 돌아와 아무래도 나는 평생 여행자로 살아갈 것이라고 직감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진을 겪고 앞으로 비행기를 탈 수 없겠구나 확신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직감과 확신은 자주, 보기 좋게 엎어진다. 나는 더이상 여행자로 살지 못했고 비행기를 다시 탄다...!
역시 동남아 밖에 없다. 1년 반째 수입이 없는 우리의 통장 잔고를 생각해서라도. '마일리지 아까워 내 하는 수없이 간다'는 포즈에 걸맞지 않게 어느새 우기인지 건기인지, 가성비 좋은지 아닌지, 직항이더라도 얼마나 가까운지 등등을 따지고 있는 나였다. 조호바루 한달살기, 라오스 한달여행, 우붓 한달살기를 제치고 낙점된 곳은 평생 한 번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베트남이었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많더라도 무언가를 선택할 이유는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러니까 아마 베트남은 가장 가깝고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을 것이다.
여행지를 정했지만 흥이 나질 않았다.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속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 제손으로 비행기표를 덥썩 사는 건 쉽지 않은 일. 항공권 예약에 두 달은 걸렸을 것이다. 다시 두 달이 속절없이 지나고 떠나기 한 달 전에야 숙소 예약을 했다. 그것도 숙소 예약 사이트에 뜬 "객실 매진" 이라는 글자에 놀라서였다. 4개 도시에 머무를 예정인 데다 그 도시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니 섣불리 예약할 수 없다는 건 오판이었다. 베트남이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많았지. 숙소 몇 개를 알아봐두고 여행책자 쪼가리를 보며 그중 한 곳을 찾아가 무거운 배낭을 턱 내려놓으며 "두 유 해브 어 룸?"을 외치던 때와 얼마나 멀어진거냐 대체. 그렇게 어찌저찌 각 도시의 위치도, 하물며 숙소의 위치도 모르면서도 평이 좋은 곳들을 골라 적당히 예약했다. 철칙은 하나. '환불 가능' 상품이어야 한다!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어야 한다는 속내였을까.
예전의 나는 어땠더라. 여행에서 조심스럽긴 했어도 정말이지 겁이 없었다. 죽음은 책에 나오는 어떤 개념 같은 거여서 살아 있음이 지겨운 20대에게 더 무서운 건 차라리 끝없는 젊음이었다. 비행기 공포? 그게 뭐야 촌스럽게. 비행기는 기내식이 나와서 행복했고 멀리 데려다줘서 그저 좋았다. 20년 전, 곧 타야 하는 로얄네팔 항공이 고장(!) 나 수속이 미뤄졌다는 말을 들었어도 '설마' 하는 두려움은 한 자락도 펼쳐지지 않았다. 십 수년 전 에티오피아 항공의 탑승 수속을 밟으면서는 근래 벌어진 이 항공사의 사고를 떠올리며 잠깐 두려움에 빠졌지만 비행기가 날자마자 침을 흘리며 숙면을 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일들도 그득했다. 네팔에서는 고산병에 걸려 히말라야 자락에 혼자 남겨졌다. 약도 뭣도 없이 고도에 적응하기를 기다렸을 뿐. 인도의 한 고산 도시에서도 고산증세가 와서 화장실에서 잠시 쓰려졌지만 그때도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누워 혼자 회복했다. 또 인도에서는 성추행을 당할 뻔 했던 적도 있다. 혹시 모를 개똥을 피하려다 커다란 소똥을 밟은 느낌이었다. 아무 일 없이 잘 빠져 나왔지만 한끗차이로 아찔해질 뻔 한 순간. 또 역시나 인도에서(이쯤 되면 인도는 어떤 나라란 말인가...) 맨스플레인(그땐 이런 용어조차 없었지만 그런 남자들은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있겠지) 쩌는 한국 남자와 말다툼을 하기도 했는데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음에 새삼 안도한다. 터키의 무례한 상인과 말다툼했을 때에도 결말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우간다에서는 말라리아에 걸렸고 역시나 고산을 오르다 고산증세에 시달리기도 했다(이쯤 되면 산을 끊어야 하는데...). 이집트에서는 작은 사기를 당했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연애를 거는 남자를 차단해야 했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 같은 건 셀 수 없이 많아 이런 리스트에 넣을 수도 없다. 내가 무슨 백인들의 땅을 여행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이런 일들이 잔뜩 벌어져도 다음 배낭여행을 기대했다. 지진과 트라우마를 겪지 않았어도 다음 여행을 꿈꿨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일부러 '비행기 공포증 약'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해본다. 글을 읽어 내려간다. 정말 다양한 이유로 비행기 타는 것을 걱정하는 랜선의 동지들. 극복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선다. 제주도로 향하던 그 밤, 커다란 배의 다인실 침대에 누워 온몸으로 전해오는 진동을 두려움 속에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던 듯 하다.
오래전 돌상에서 귤이가 잡은 것은 비행기 장난감이었다. 그걸 잡았을 때 나는 기뻤다. 그때는 내게 지진도 트라우마도 공황도 없을 때여서. 그런 흐리고 두렵고 불안한 것이 다가올 거라고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훨훨 세계로 날아가라 나의 아기야, 내가 내 엄마보다 더 자유로운 것처럼 너도 나보다 더 자유로워라, 나의 아기야.
그 꼬맹이가 처음 다른 세상을 만날 때 그 곁에 있고 싶었다. 정말 하기 싫은 숙제처럼 꾸역꾸역 여행준비를 해나가면서도 내가 가진 단 하나의 단단한 마음은 그거였다. 내가 살면서 겪어본 두려움과 괴로움을 너는 겪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겪게 되더라도 말해주려고. 그 어떤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아주 조금은 꿈틀거렸다고 말이다.